술에 취한 밤, 서울숲을 걷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늦은 저녁, 마스크도 없이 술에 취해 서울숲을 걸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 마음 한 켠이 묘하게 시렸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복잡하고 답답한 감정들에 가슴이 뛰고,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나를 감쌌다.
30년을 영업이라는 길 위에서 걸어왔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사람을 통해 웃고, 울고, 상처받고, 또 회복하며 살아왔다. 영업인은 늘 자존심을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세워주고, 잘났다고 칭찬해 주며, 마음을 열게 해야 한다.
그런 자세가 몸에 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즘 젊은 영업인들을 보면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공황장애를 겪거나, 결국 영업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예전엔 고객이라는 이유로 갑질을 일삼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꿋꿋이 버텨야 했던 동료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나마 나는 여자 영업인이라 그런 대접을 심하게 받은 적은 드물었다.
다행히 요즘은 사회 전반에 감성적 성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말을 아끼고, 존중하려 애쓴다. 그런데도 나는 요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점 멀리하고 있었다. 내 시간을 갖고 싶었고, 나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개의 모임에서 나에게 사무총장과 총무 같은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처음엔 망설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고심 끝에 결국 받아들였고, 집행부의 일원이 되었다.
자유롭던 나의 시간이 하나둘 사라졌고, 저녁 모임이 잦아졌다. 술자리도 많아졌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인생 뭐 있어? 사람들 만나며 즐기자. 너무 나의 배움에 매달리지 말자.” 그렇게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는 쉽지 않다. 특히 술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술에 취하면 사람들은 무심코 말이 많아진다. 때로는 무례해지고, 때로는 직설적이다.
“누가 당신에 대해 이런 말을 하더라.”
“당신은 왜 그렇게 살아?”
“당신은 고쳐야 할 게 참 많아.”
술은 사람의 뇌를 속인다. 내가 하는 말이 다 옳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나이가 많아도, 술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그리고 다음 날, 사람들은 연락해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 말에 나도 흔들리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런 날이면 생각한다.
“내가 왜 다시 이런 자리에 들어섰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어제도 그랬다. 술에 취해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숲을 걸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술에 젖은 정신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먼지만 마시고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목은 붓고 몸은 무거웠다. 일찍 퇴근해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여니, 맑은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서울숲을 향해 걸었다. 새벽마다 뛰던 길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의 서울숲은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환하게 핀 꽃들, 웨딩 촬영 중인 커플, 직장인들… 새벽 어둠 속에선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목련은 이미 만개해 있었고, 내일이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뛰기만 했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모임도, 그 자리에서 마주치는 감정도, 다 의미가 있었다. 힘들고 지쳐서 그 자리에 오는 이들은 그저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들의 말이 헛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내가 그것에 서운해하지 않고, 오히려 들어주고, 공감하고, 같이 웃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건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따뜻한 방식이다."
이제는 그렇게 믿고 싶다.
나의 작은 배려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이 역할을 맡은 2년이라는 시간이 힘듦의 연속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이라 믿고 싶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변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장한다."
이제 나는, 전보다 더 다양한 사람과 관계 속에서 한층 더 성숙해질 나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