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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
내 삶을 바꾼다

by 허당 써니

비가 온다는 예보에 오늘 아침 런닝은 포기했다. 대신, 늘지 않는 영어 공부에 다시 마음을 붙여본다.

혼자 외국 여행을 목표로 꾸준히 공부 중이지만, 영어는 마치 마라톤보다 더 멀고 험한 길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나의 성격은 꾸준함이니까.

여섯 시 즈음, 해가 뜨기 전의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온다더니, 하늘은 조용하기만 했다. 무의식적으로 런닝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결국 발길을 서울숲으로 향했다. 강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며 활짝 핀 몽련꽃 향이 짙게 코끝에 스친다. 눈을 감고 잠시 향기에 취해 본다. 바람이 마치 꽃향기를 내게 더 가까이 데려다주려는 듯, 내 얼굴과 어깨에 부드럽게 머문다.


문득, 지금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는 의성 산불이 떠올랐다. 자연의 바람에 꺼지지 않는 불꽃. 그로 인해 사라진 생명들. 인간이 만들어낸 최첨단 장비로도 멈출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서울숲엔 평소보다 사람이 없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게으름을 피고 집에 머물러있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마에 간지러운 빗방울이 하나둘 닿는다. 곧이어 얼굴 전체를 덮는 비. 그 비는 마치 땀과 함께 나를 정화하듯 씻어주었다. 갈증을 느끼던 땅과 나무에게도 비는 선물이었으리라.


문예지 사소한 것들

새벽잠을 깨우는

한 번의 모기 날갯짓


하이얀 무릎에 생채기를 남기는

땅속의 작은 돌부리


커다란 산을 잿더미로 만드는

모래알 같은 불씨


작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

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꿀 것들



이 시가 머릿속을 맴돈다. 오늘 아침 런닝 대신 영어 공부를 택했던 나의 작은 선택처럼. 매일 하는 달리기, 외국 여행을 향한 마음,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 있는 작은 습관들. 그 사소한 것들이 언젠가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점심엔 10년째 인연을 이어가는 S통신사 고객을 만났다. ‘여행술사’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위트 있고 스마트한 사람.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친구지만,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제품 납품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관계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대부분의 관계가 일과 함께 사라지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영업사원인데도 불구하고 맛집에 관심 없는 나에게, 그는 늘 새로운 장소를 소개해 준다. 길눈이 어두운 나를 위해 먼저 와서 기다려주거나, 중간에서 만나 함께 이동해주는 그의 배려는 늘 고맙기만 하다. 오늘은 명동의 ‘서울복집’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좀 더운 날씨지만 국물이 생각났는데,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복껍질무침, 복튀김, 참복지리... 진한 국물에 속이 풀리고, 마음도 풀렸다.

식사 후, 명 동성당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배가 불러도 그는 꼭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런 습관도 이제는 나에게 익숙해져, 혼자서도 가끔 케이크를 고른다. 사람을 만나면서 스며든 습관들. 때로는 이런 작은 변화들이 내 일상에 따뜻한 색을 입힌다.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면서,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아무 말이나 툭 던지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의 마음에 닿는 말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는 상대를 넘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카페를 나와 혼자 명동성당을 걷는다. 고요한 공기 속에,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요즘 내가 사는 성수동에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었다. 회사도 집도 모두 가까운 익숙한 동네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아는 특별한 맛집도, 볼거리가 많은 동네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처음엔 단순히 ‘요즘 핫플이라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찾는 건 꼭 크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성수동은 새로운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낯선 공간이고, 익숙하지 않은 일상이기에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눈엔 평범하게 보이는 골목길 하나, 소금빵 하나도 누군가에겐 기억에 남을 특별한 장면이 될 수 있다.

그걸 보며 다시 깨닫는다. 나의 하루, 나의 습관, 내가 지나치는 풍경 속에도 충분히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회사로 복귀하던 중 지하철에서 마주친 유럽 여성 세 명이 서울 관광책자를 펼쳐 공부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친구끼리 오랜만에 떠난 여행인 듯했다.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내게, 그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성수동 지도를 펼쳐 보이며,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냐고 묻다. 지금은 왕십리역이라고 알려주고 손가락으로 역을 찝어주었다, 용기 내어 말했다.

“Follow me.”

내가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짧은 영어였지만, 그들에게는 충분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성수에서 내렸다. 아무 말 없이 그녀들은 내 뒤를 따랐다. 그녀들이 찾던 소금빵집까지 직접 데려다 주었다. 나의 작은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정.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I hope you have a good tour.”

길을 안내한 나였지만, 마음속엔 그들이 내게 준 따뜻한 여행의 여운이 남았다.


오늘도 나는 작은 순간의 모든 조각들이 모으고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을 바꾸는 건 거창한 목표나 큰 사건이 아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꾸준한 영어 공부, 새벽의 달리기, 따뜻한 한 끼 식사, 뜻밖의 친절.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 언젠가 이 모든 조각들이 모여, 나만의 여행이 완성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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