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으로 가는 길 위에서
창밖 하늘은 옅은 하늘색이다. 마치 붓으로 툭툭 뿌려놓은 것 같은 구름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요즘 노안이 와서 세상만물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하늘까지 노안이 온 걸까 싶어 웃음이 난다.
오늘은 가족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해남. 미국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돌아온 아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2년 전, 처음 면허를 딴 날. 여주 친정집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아들이 처음으로 운전을 했다. 그런데 그날의 기억은 ‘따뜻한 첫 운전’이라기보다는 거의 ‘심장 탈출 시뮬레이션’에 가까웠다.
“야!! 180km면 어떡해!!”
“엄마 괜찮아. 차 상태가 좋아서 그래.”
“차 상태가 문제가 아니야, 내 정신이 나갈 것 같다고!!”
“당장 세워! 이놈한테 운전대 다시 주지 마세요!!”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이후로도 나 모르게 가끔 아들에게 운전대를 쥐여줬다.
말없는 남편은 운전대를 잡으면 말 대신 속도를 낸다. 결혼 전부터 운전할 때만큼은 온순하던 남편의 성격이 변해, 그 속도 문제로 몇 번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그 아빠를 꼭 닮았다는 거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부여부터 아들이 운전을 시작했는데, 속도는 135km 정도. 예전 보다는 느리지만 예전의 나였으면 지금의 속도도 눈이 뒤집힐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내 마음을 다스려라.”
– 공자
그렇다. 이번 여행은 특별하다. 아들이 이번 방학을 마치고 돌아가면, 적어도 4년은 한국 땅을 다시 밟기 힘들 것 같다. 가는 날 영주권 신청을 하기에,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단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번 여행만큼은 ‘함께 있는 이 시간’에 더 깊이 몰입하자고.
우리 가족의 여행은 늘 각자 방을 잡고 밥 먹을 때만 만나는 자유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여행,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요즘은 술도 거의 먹지 않는다. 내 생각과 다르면 바로 말을 끊던 나였지만, 이번엔 참아보려 한다. 고객의 말엔 몇 시간이고 집중하면서, 왜 가족의 말은 그리도 성급히 잘랐을까.
“끝까지 듣자, 서두르지 말자. 경청하고, 미소를 띄우자.”
이건 이번 여행의 나만의 미션이다.
지금은 함평 휴게소. 아들은 차를 조심스럽게 주차했다. 햇볕은 뜨겁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나는 아들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보인다. 그리고 조용히 엄지척을 해 보인다.
그 순간, 아들도 말없이 나를 향해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엄마, 나도 이제 조금은 어른이 되었어요.”
가족은 멀리서 보면 나를 지켜주는 성(城)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가끔은 나를 가장 먼저 상처 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를 꿰매주는 것도 결국 가족이다.
해남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흩어진 구름처럼 우리 삶도 어딘가 흐트러져 있지만, 그 틈틈이 사랑이 스며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가족과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은 게 언제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