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번에 미국가면 학교 스타벅스에서 알바도 해보고 외국 친구들도 좀 더 사귀어볼게요.”
남해 바닷가의 밤, 호텔 테라스에서 남편과 아들과 나눈 짧은 대화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복분자처럼 달콤했던 와인보다 더 진했던 그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림이 내게 오래도록 남았다.
하늘 위의 먹구름은 마치 우리의 이별이 아쉬운 듯, 빗방울을 떨구지 않고 몇 분째 우리 차를 따라왔다. "비라도 쏟아지면 괜히 눈물이 들킬까봐 참는 거 같아." 나는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 모습이 꼭, 내 마음을 닮았다. 서툰 표현력,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나 자신.
4박 5일의 가족 여행이 끝났다. 32도의 무더위 속에서도 골프를 치고, 남해의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웃고 먹고 걸었다.
15년 전, 아들이 아직 어렸을 때 우연히 배를 타고 들어갔던 완도 명사십리의 감동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동만큼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된 아들과 다시 그곳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맨발로 밟는 고운 모래의 감촉은 새롭고도 깊은 기억이 되었다.
"준우야, 미국에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고, 아빠는 운동 좀 하세요."
내 입에서 반복되는 잔소리는 어김없이 저녁 식탁의 공기를 무겁게 했다. 전라도 잎새소주를 따라놓고 분위기를 띄워보려 했지만, 대화는 어색했고, 식사는 20분 만에 끝났다. 그렇게 다시, 각자의 방으로. 그래도 마지막 밤은 조금 달랐다.
가족이 함께 호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며 식사를 했다. 집에서 가져온 와인을 콜키지로 열어,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남편과 아들에게 한잔씩 따라주었다. "아빠한테도 영상통화 자주 해줘." 남편의 말에 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짧은 대화 하나에,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서로를 잘 알면서도 좀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 가족. 그날 밤, 별이 떠 있는 테라스에서 처음으로 마음이 천천히, 부드럽게 풀어졌다.
“엄마, 맥주랑 새우쌈 더 사왔어요.”
아들은 나의 기분을 눈치채고 자연스레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눈치 하나는 정말 최고야. 엄마 마음을 참 잘 읽어.” 내 말에 아들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남겨졌다. 남은 와인을 마시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이 기분을 나눴다. 취기가 살짝 돌았지만, 마음만은 선명하게 맑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조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아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앞으로 3~4년, 아들을 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우리 부부는 둘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나와 남편의 직장 문제는 어떻게 흘러갈까?
답은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 피터 드러커
불안도, 두려움도,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결국 모두 성장의 일부일 것이다. 지금의 나를, 지금의 우리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고맙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줘서.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지금, 아들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이 글을 쓴다. 나 자신에게 말하듯, 그 시절의 나를 다독이듯.
이제는 바란다.
내가 좀 더 유연해지고, 덜 조급해지기를.
가족을 향한 사랑을, 말로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이 여행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 가족의 여정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고 있다.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서툴게. 하지만 언제나 함께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