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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대신 평온을 선택한 날,
동주가 시작되다

by 허당 써니

비 오는 장마철, 우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종아리까지 젖은 검은 정장 바지, 얼굴 위로 흐르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신발 속은 아직 마르지만 마음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3개월 동안 답 없는 고민.
“이 나이에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절에 들어가 편하게 살까?”
무일푼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그 와중에 서울에 아파트 하나, 오피스텔 하나.
이 정도면 성공한 삶 아닐까… 하지만 어딘가 허전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나는 계속 달렸다.
결정은 그 달리는 순간 찾아왔다.
‘그래, 회사를 차리자.’ 그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나는 모든 시나리오를 가정했고, 최악도 각오했기에, 두려움보다 평온이 앞섰다.


그날 오전 미팅은 예상대로 무거웠다.
7월 분기 마감 전, 벤더사의 여신 한도 삭감을 갖고 벤더사 사장과 벤더사 채널 부사장, 나와 사장님이 미팅을 했다.
“죄송합니다. 신용등급 하락으로 인해 여신은 줄여야겠습니다.”
20년 넘게 파트너십을 유지해온 그들은 가차없이 말을 던진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지급을 미룬 적이 없었다.

“그럼 오늘 지금부터 바로 우리가 제품을 수입할 수 없다는 겁니까? 이번 분기마감 건은 도와주셔야죠?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디 있나요.”
목소리는 떨리고, 숨은 가빠왔다.
그들은 고개만 숙이고 아무말 없이 잠시 앉아있더니 일어나 떠났다.


3개월 전, 사장은 두 본부장과 식사자리에서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당신들은 걱정하지 말고 기존데로 일하면 됩니다.”
나는 사장한테 배신감이 앞섰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그때 이미 예감했다.
이건 우리 모두가 떠안을 위기라는 걸.


오전 미팅이 끝나자 사장은 두 본부장을 소집해 말했다.
“각자 분사 준비하세요. 사이트는 다 드릴 테니 직원 데리고 나가서 차리세요.”


기회였다.
아침 달리기 중 결심했던 그 선택이 현실이 되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밖으로 나왔다. 쉼 없이 움직였다. 쉐어오피스를 보러 다니고, 계약서를 쓰고, 법무사를 찾아갔다.

법무사 사무실은 익숙한 곳이었다.
주말 아침 마다 혼자 아차산을 가기 위해 지나쳤던 구의동 지하철 앞, 익숙한 간판. 지인이 알려준 법무사가 이 간판의 법무사다.


시작이 뭔가 잘될 것만 같았다.
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 이름을 지어야 했다.

2년 전 연락이 끊긴 명리학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잘 지내셨지요. 얘기하기 긴데 제가 갑자기 회사를 설립하게 됐어요. 혹시 제 사주에 부족걸로 회사 이름 하나 지어주실 수 있나요?” 교수님은 당황해하셨지만 1시간만 달라고 하셨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동주(東洙) 어떨까요?
동쪽에서 해가 뜨고, 물로 재물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동주 코퍼레이션. 마음에 쏙들었다.
나는 그렇게 늘 급하고 빠르게 내 방식대로, 단 하루 만에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숲을 달리며, 직원들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알릴까 고민했다.
25명의 팀원 중 이미 4명은 함께 하기로 마음을 나눴다.
하지만 정리된 사이트를 보니 15명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를 설립한 게 목요일이다. 그다음 월요일 아침,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아시다시피 회사 신용등급이 떨어져 영업이 쉽지 않았어요. 갑자기 전주부터 벤더사의 여신이 멈췄습니다.
사장님은 각 사업부 분사를 지시하셨고,
그래서 저는 회사를 만들 예정입니다.
모두 함께 가고 싶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최대한 함께 할 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과 내일, 서상무를 통해 개인 면담을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순간, 직원들의 눈에서 두려움이 읽혔다.
그들의 가족, 생활, 미래…
그 모든 무게가 내게로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나는 더 말을 잊지 못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커피숍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가방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 읽었다.
책은 언제나 나를 현실과 분리시켜 준다.


저녁엔 서상무를 만났다. 맥주 500CC가 나오자, 갈증을 느낀 나는 한 번에 원샷을 해버렸다.
“직원들 뭐래?”
“전문님이 말씀하신데로 연봉 30% 삭감 가능성 있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대부분 같이 하겠대요. 두 명만 내일까지 고민해서 말해주기로 했어요.”

잔을 내려놓자, 지금까지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내 고민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터졌다.
“내가 뭘 잘했다고, 이 사람들이 나를 믿는 거지?”
가족 있는 직원들인데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니...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함께라면 반드시 도달하리라.”
– 헬렌 켈러


하지만 나는 냉정해져야 한다.
감정만으로는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


다음 날, 직원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들의 눈빛에는 불안과 기대가 엇갈려 있다.
내가 사무실을 여기저기 움직일때 마다, 그들은 나의 동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반응을 읽는다.

나는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정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고, 감정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갈 길은 멀고, 나는 그 길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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