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도 걷고 싶은 계곡이 있을까?
무더운 여름날, 단지 '피서'를 넘어서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에어컨 바람도, 인파 가득한 워터파크도 아닌, 조용한 곳에서 나만의 여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 그런 갈증을 가진 채, 지난 7월 나는 청송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엔 그저 맑은 계곡물에 발 담그는 기분이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백석탄 계곡은 나의 그런 소박한 기대를 아주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무너뜨렸다.
‘백석탄(白石灘)’. 이름만 들으면 왠지 평범하다. 하얀 돌이 있는 여울쯤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곳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하얀 돌'이 얼마나 압도적인 아름다움인지, 그 곡선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교하게 자연이 깎아낸 조형물인지를.
햇살이 계곡 안으로 스며들 때, 바위들은 빛을 머금고 있다가 슬며시 반사시킨다. 물빛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그 위에 떠 있는 바위는 마치 동양화 속 한 장면 같다. 하천 바닥을 덮고 있는 석회암 지층은 눈부실 정도로 밝다. 그 빛 아래 걷는 발걸음은 절로 느려진다. 가끔은 멈춰 서야 한다. 아름다움이 자꾸 생각을 붙잡는다.
바위를 보며 “이건 정말 자연이 만든 걸까?”라는 감탄이 터진다. 이 계곡에서 가장 특별한 건 '포트홀' 지형이다. 바위에 난 동그란 구멍들. 장난스럽게 찍어낸 것 같지만, 실은 수천 년 동안 물이 돌을 돌리며 파낸 자국이다.
마치 자연이 끈기 있게 조각한 흔적. 과학자들은 이것이 지질학적으로 얼마나 드문 현상인지 설명하고, 유네스코는 백석탄 일대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그 설명을 듣고 다시 바위를 보면, 단순히 예쁜 풍경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현장인 셈이다.
계곡길을 걷다가 ‘조어대(釣魚臺)’라는 작은 표지판을 발견했다. 낚시터? 싶었는데, 알고 보니 조선 시대에 실제로 선비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런 정취를 담은 이름이었다.
또 ‘가사연(歌辭淵)’이라는 곳도 있다. 이름부터 묘하게 감성적인데, 전설에 따르면 이 풍경에 감동한 시인이 계곡 옆 바위에 시를 새기기도 했단다. 그러니까 백석탄은 단지 풍경 좋은 계곡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감성과 여유가 흐르던 사색의 장소였다.
나는 그 길을 걷는 동안, 여느 여행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시간의 정적’을 느꼈다. 지금 내가 밟는 이 돌 위에, 400년 전에도 누군가 시를 읊으며 앉아 있었다니. 과장이 아니라, 숨소리마저 작아졌다.
백석탄 근처에는 ‘고와동’이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이 이름에도 전설이 있다. 조선 선조 시절, 한 장수가 전쟁에서 돌아온 뒤 이 계곡에 정착했다고 한다. 수많은 병사들을 잃은 그는 이 계곡에 마음을 위로받았고, 그 감정을 담아 ‘고와동’이라 이름 붙였다. '아름다움'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그 속에 스민 슬픔과 회복의 정서도 함께 느껴진다.
이처럼 백석탄은 단지 지질학적 가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다.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감싸고, 위로하는 그 ‘온도’가 이곳에는 있다.
많은 계곡이 인공 구조물과 상업 시설로 뒤덮이는 가운데, 백석탄은 유독 조용하다. 흔한 음식점 간판도 없고, 인공 계단도 없다. 대신 나무가 만든 그늘과, 바위가 만든 벤치, 바람이 만든 길이 있다.
이곳에선 ‘풍경’을 찍는 대신, ‘시간’을 찍는다. 나는 백석탄을 걸으며, 바쁘게 걷는 습관을 잠시 접어두었다. 발끝에서 전해지는 바위의 감촉, 졸졸 흐르는 물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사운드. 모든 감각이 ‘천천히’로 맞춰졌다.
이곳은, 도시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게 해주는 장소다.
백석탄은 단지 ‘계곡’이라고 부르기엔 아깝다. 흔한 물놀이나 시원한 공기 이상의 무엇이 있다. 자연이 만든 미술관이자,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시간의 통로다.
여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러 떠나지만, 진짜 ‘여름을 기억할 만한 곳’을 찾는다면, 백석탄은 그 해답이 된다. 산책로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고, 작은 웅덩이 하나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단 하루의 방문이 평생의 기억이 되는 곳. 그것이 백석탄이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