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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룡 May 14. 2022

"엄마가 아픈 사람처럼 구석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어. '여서 뭐하노 얼른 일나라'며 흔들어 깨우니, 고개 들어 나를 보고는 가만히 웃는 기라"


아내를 입원시키고 온 다음 날 큰누나가 내게 말했다.

몇 달 전 둘째 누나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날에도 큰누나는 엄마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날도 꿈속에서 엄마는 별 말없이, 가만히 보고 웃기만 했다 한다.


큰누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부산 봉제공장에 들어가 고사리 손 두세 배는 되었을 미싱 핸들을 잡았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농사일 거든다고 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부모에게 원망하거나 다른 친구들처럼 중학교 보내 달라고 떼쓰는 일 없이 속으로만 삭혔다.


제 앞으로 된 땅 한 뙤기 없던 가난한 소작농 부모 밑에서 난 장녀들은 대개가 그랬다. 빈농 집안의 유일한 재테크 수단이었던 소처럼, 뼈마디가 단단해지기도 전에 손에 풀물을 들여야 했고, 입이라도 던다는 핑계로 서둘러 도시의 공장으로 팔려나갔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저는 다리에 인공관절을 끼운 팔십 노모가 몸을 기우뚱이며 밭일을 다니던 말년에 누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찾아와 맛난 것 사 먹이고 옷 한 벌 사 입히는 수고를 '사는 재미'로 즐겼다.

그런 엄마와 딸 사이에는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니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뼈마디 앙상한 초로의 노인인 모습으로 엄마가 꿈에 보이는 것일 테다. 엄마란 존재는 그런 것이다. 아무리 나이 들고 병들어 앙상한 몸을 하고 있어도, 곁에 있는 것 만으로 비빌 언덕과 위로가 되는 존재.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놀랄 일이 있을 때 입에서 '엄마'라고 자동으로 튀어나오듯이, 힘든 일이 생기면 늘 의지하며 기대던 엄마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큰누나 선몽 덕분인지 둘째 누나도 병석에서 한 달 만에 일어나 지금은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고, 아내도 전이된 곳 없이 깨끗하게 수술해 일찍 퇴원해 집으로 왔다.


이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만지작이는 이유는 나도 선잠에 짧은 꿈을 꾸다 깼기 때문이다. 내 꿈에선 반대로 네댓 살 밖에 안된 어린 시절 큰 딸이 나왔다.

얼굴에 꾀죄죄한 검정을 묻히고 어린 딸이 아빠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나는 장난을 치고 싶어 얼른 흐름 한 나무문 뒤에 몸을 숨겨서 숨바꼭질을 했다. 아이가 다가오자 나타나 반겼는데, 꼭 안아줬는지 볼을 비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일찍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역시나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 집안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열 한두 살에 아버지의 아버지를 호열자(아마도 콜레라, 호랑이에게 찢기는 것처럼 아프다는 뜻)로 잃고, 아래로 남동생 하나와 두 여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동네서 이름난 미인이라 이십 대에 미망인이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에 재가를 했다. 하지만 슬하의 네 아이는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온 동네 머슴처럼 불려 다니며 남의 집 농사일을 해 동생들을 돌봤다.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와 지금도 살아계신 작은 고모는 늘 큰 오빠를 부모처럼 대했고, 큰오빠 아내인 엄마와도 사이가 좋았다. 아무 재산도 없이 일만 할 줄 아는 큰 오빠에게 시집와준 올케가 반갑고 고마웠을 것이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재가한 집에서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언 듯 그들이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두 분 아재들도 우리 집과 한 집안처럼 가까이 지냈고, 모두들 아버지를 친형 못지않게 따랐다.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무학이었다. 6.25 막바지에 훈령병이 되어 제주도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살아 계실 때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대개 그 시절 분들이었던 걸 보면. 술과 담배도 군대에서 배웠는데, 술을 마셔도 남들처럼 술주정 한 번 하는 일 없었고,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 두 갑씩은 피우던 담배는 한번 심하게 위염을 앓고 난 후로 단방에 끊었다. 논두렁 꼴을 베면 능숙한 이발사가 깎아놓은 스포츠머리처럼 단정했고, 산에 나무 짐을 쌓으면 다른 사람 것은 몰라도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나무 짐은 알아볼 정도로 자로 잰듯했다.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할 줄 몰랐지만, 늘 인자한 아버지였다. 당시만 해도 집안 가장은 술에 취해 마누라 자식들 두들겨 패는 게 일상이었는데, 아버진 한 번도 어머니나 어린 자식에게 욕설하거나 손을 올린 적이 없다. 자식들이 마음에 들기만 했겠나. 속 썪이거나 성에 차지 않을 때도 그저 끌끌 혀를 차는 정도가 다였고, 속으로만 삼켰다.


아버지가 왜 그처럼 강박적으로 마당을 쓸고, 일손이 예사롭지 않게 야무졌는지, 가장 천하게 자랐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양반' 소리를 듣게 됐는지 전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태성이고 습성이라고만 여겼는데, 이제 나도 나이 들어보니 모든 게 다시 보인다.


평생 머슴처럼 불려 다니며 남의 집 일을 했기에 허투루 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어머니가 재가를 했고, 철없는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기에, 남들 눈 밖에 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늘 우리들에게 하는 말도 '동네 어른들 보면 꼬박꼬박 인사 잘하라'는 말 뿐이었고, 그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육의 전부였다.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아버지는 당연하게도 까칠하고 따가운 수염이 무성한 50대의 모습이다. 말 없는 산처럼 든든하고 몸도 다부져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던 중년의 사내. 오로지 자신의 땀 만으로 구석진 기슭 땅 몇 평을 산 것이 세상 가장 큰 기쁨이었을 그가 참 힘들고 외로웠을 거란 생각을 한다.


집안 아들이라고 보내준 대학에 들어가 데모를 하고 다녀도 아버지는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너무 앞서다 다치지만 마라는 정도였지.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에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끝내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김영삼이 그 유명한 삼당합당을 하는 걸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이놈 참 나쁜 놈이네. 평생 야당 하다가 대통령 해 먹으려고 거길 들어가".

경상도에서 태어나 무학으로 평생 농사만 지은 아버지는 이듬해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1%를 받은 백기완에게 투표를 했지만, 아버지가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작은 지역신문에 취직을 했고, 자동차 없이 버스 타고 걸어 다니며 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중고차라도 한 대 사줬으면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 시행한 농기계 반값 지원 정책이 나오자 아버지는 오랜 숙원이었던 경운기를 한 대 샀다.(그 때까지 우리는 경운기도 없이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운전해 본 일이 없기에 주말에 내가 기계를 배워 논과 밭을 갈았다.

그 해 봄도 경운기를 쓰고 집 앞에 세워두었는데, 흙 묻은 경운기를 노부부가 물로 씻은 후 비닐하우스 철재로 만든 차고에 후진으로 넣다가 운전미숙으로 사고가 났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가끔씩 그때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 김영삼이 야합을 하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지 않았고, 농기계 반값 지원 대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농산물 개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내가 취직을 해서 한 번도 아버지에게 용돈 한번 제대로 줘보지 못했다는 게 오래도록 아팠다. 한두 해 후 엑센트라는 중고차를 샀을 때는 아버지를 한 번도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태워 어디든 다녀오지 못한 게 안타까웠고,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을 때는 예쁜 손녀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아쉬웠다.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래서일까. 어린 딸아이 얼굴을 꿈에서 보고는 아버지가 먼저 생각이 난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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