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에 책임감을 갖는 것이 어른됨의 시작이다
J.H 네루가 감옥에서 딸 인디라 간디에게 쓴 편지를 엮은 ‘세계사편력’을 읽은지가 이십년도 더됐는데, 오늘 갑자기 그 중 한 대목이 생각난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용을 떠올려 보면 대충 이렇다.
“나이가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육십이 넘어도 어린애 같은 사고 수준에서 머무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려도 넓고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해서도 안되고 단순히 나이만 들었다고 어른대접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어리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말한다. 유아시기엔 걸음마에서 양육, 옷 입고 대소변 처리하는 것 까지 주변의 도움 없이는 블가능하다. 그러다가 스스로 걸음마를 떼고, 음식을 먹고, 홀로 사고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먹고 입고 씻는 행위를 혼자 하더라도 경제적인 자립과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아직 어른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작은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끝없이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나이가 아무리 들었어도 어린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됨’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보살핌을 받는 게 어림의 기준이라면 보실핌을 주는 것은 어른됨의 기준일 것이다.
독립된 개체로 홀로 서는 상태를 넘어, 아이를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사회를 돌보고, 공공영역을 위해 자신의 것들, 돈과 시간과 재능을 기꺼이 내어 놓고 나누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어른스럽다’고 말한다.
공자와 논어에 대해 책을 내기도 한 이남곡 선생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공인’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스스로 독립한 개체로 성장했더라도 나눔을 모르고 끝없이 탐욕을 추구하며 사적인 이해득실만을 유일한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사인’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기준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평가하자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린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어 버린 시스템이라 할 것이다.
끝 없는 탐욕으로 몸집을 부풀리고 거대한 식욕과 힘을 자랑하지만, 스스로 몸조차 가누지 못해 파멸로 내달리는 늙어버린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꿈꾸는 대안사회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의 핵심 가치는 욕망과 성장을 넘어 나눔과 보살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눔이란 꼭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히려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나눔을 행하며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에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
그래서 ‘어른됨’이란 오히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우정에 처음으로 눈 뜨던 열다섯 시절의 사고와 감성을 오염 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