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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Mar 08. 2024

쓰와노의 거리를 거닐다

일본 야마구치를 다녀왔다.

벚꽃이 피지 않는 봄의 문턱이라 마치 옛 흑백필름속의 사진을 보듯 나는 그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식당에서 우동을 먹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문했다. 뜨거운 물을 좀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가마솥에 긴 국자로 물을 떠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눈앞에 펼쳐진 산등성이에는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혼마치 거리를 혼자 걷는다. 이곳은 일본 쓰와노의 작은 교토라 일컫는 만큼 옛 풍경이 남아있는 동네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혼마치 골목은 17세기 상점의 거리를 생각할 만큼 그때의 시간에 멈춰져있다. 어슬렁거리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골목마다  졸졸 흐르는 하천엔 팔뚝만한 잉어가 떼 지어 다닌다. 잉어도 사람도 연륜을  가진 마을.  한 때 번성했을 술 창고엔 술을 담았던 드럼통은 없어진 지 오래다, 종일 노동에 지친 남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그 많은 술은 세월에 휘발되었고, 꾸미기 좋아하는 일본여자들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잡화점은 간판만 그대로 남은 채 누렇게 퇴색되었다. 꽃핀을 꽂고 기모노를 입고 다닐 이 마을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종이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종이를 파는 상점이라 궁금증이 인다. 문을 열자 석유곤로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먼저 와 닿는다. 기억 속에 냄새가  빗장을 여는 느낌이었다. 가게를 지키는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선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좌판 위에 오른 종이로 만든 것에 눈길이 간다. 종이엽서, 그림, 종이로 만든 인형들, 한지, 한 눈에 봐도 이런 상품들이 팔리기나 할 까 싶다.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 남은 마지막 파수꾼이 아닐까?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이 시간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나이든 어른들만 사는 동네, 비가 와서 더 고즈넉해 보였다.     


 가게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붉은 지붕을 이고 있는 독특한 세키슈 기와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기와는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얼키설키 엮어진 지붕의 구조상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튼튼해 보인다. 그 지붕 덕분에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풍경은 더욱 정겹게 보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붉은 지붕을 쳐다보고 걷자니 이윽고 내가 찾았던 쓰와노 성당에 다다랐다. 여행오기 전, ‘사일런스’라는 영화를 찾아보았다. 사일런스는 17세기 나가사키에서 실종된 네덜란드 신부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당시 종교탄압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튀어나와 이 작은 공소에서 미사 드리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이 성당은 나카사키에서 쓰와노로 유형 되어 서른여섯명이 순교한 슬픈 역사를 지닌 성당이라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춰진 그날의 슬픔들이 빛에 반사되어 일렁인다. 다다미로 만든 바닥에 엎드려 기도한다. 뜨거운 온천물로 살갗이 벌겋게 벗겨지고 고통에 몸을 비틀던 순교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서 십자가형벌을 받았으며, 거꾸로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도 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짧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일본 땅은 늪과 같아서 그 어떤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난다.    

  

 과거가 현재이며 현재 또한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멀리 할머니 한 분이 느린 걸음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거리엔 참 사람구경도 어렵다. 나는 반가워서 “곤니치와” 라고 인사했더니 할머니 입 꼬리에 웃음이 번진다. 이어 나는 한국인이고 여행 중이란 말로 운을 떼니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린다. 정말 한국인이냐고 다시 물어보신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재일교포였다. 낯선 여행자의 인사가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사연은 알 수 없으나 할머니의 눈빛엔 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출렁거렸다. 짧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내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신다. 한국이란 말만 들어도 이렇듯 기쁜 할머니를 만나 나도 왠지 마음이 짠해진다. 쓰와노에서는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일본 여행하는 내내 쓰와노의 거리가 아른거렸다. 다음엔 꼭 다시 이 고장의 명물 증기기관차를 타고 옛거리를 찾아오리라 마음먹는다. 짧았지만 강렬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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