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사람들, 2022년 8월24일 칼럼
내가 회인에 이사 온 지 올해로 꼭 10년이 지났다. 낯선 이곳에 무엇에 이끌린 듯 이사 와서 집을 지었고 해바라기 문화공작소에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영상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내가 회인 사람이라는 점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런 나에게 회인 자랑을 해보라고 한다면 무얼 꼽을까?
우선 피반령과 대청호 사이에 자리 잡은 청정지역이며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오래된 고장임을 내세우고 싶다. 약방, 세탁소, 신발가게, 문방구 등 줄지어 있는 오래된 가게들은 물론이고 뒷골목에 접어들면 돌담이 아름다운 회인 내아와 양조장, 그리고 인산객사가 유적인 듯 생활공간인 듯 차례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겨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하듯 골목 여행을 하다 보면 사직단과 향교를 만날 수도 있다. 향교와 사직단이 있다는 말은 이곳이 인근 지역을 아우르는 중요한 거점도시, 지금으로 치면 최소한 군청소재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두 유적이 동시에 남아있는 지역이 전국에도 별로 많지 않고 충북에서는 회인이 유일하단다. 옛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개발이 덜 되었다는 건데 그게 어찌 자랑거리냐고 말할 분들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모두가 경제개발과 도시화만 추구하다 보니 그로 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게다가 소확행과 감성소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람들의 소비철학이 바뀌다 보니 어중간하게 도시화 되기보다는 회인처럼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곳들이 오히려 주목을 받는, 이른바 핫플레이스가 되는 시대이니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인에는 이것보다 더 큰 자랑거리가 있으니 바로 오장환 시인의 출생지라는 점이다. 오장환 시인은 1930-40년대에 주로 활동한 모더니즘 시인으로 신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당 시대 지식인의 고뇌를 정제된 언어로 표현,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릴 만큼 유명한 분이었단다. 그런 시인이 내가 사는 회인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정말 큰 자랑거리다. 크지도 않은 회인에 ‘해바라기 작은도서관’과 ‘해바라기 문화공작소’, ‘해바라기 청년공동체’가 생겨서 자생적인 문화 운동을 시작한 것은 모두 오장환 시인의 출생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해바라기’는 오장환의 동시 제목임)
그런데 이번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생겼다. 바로 세대가 함께하는 시인학교가 열리고 이곳에서 시를 배워 시집까지 내게 된 것이다. 이는 회인이 단순히 오장환 시인의 탄생지에서 벗어나 이 시대 보통사람들이 시를 쓰고 삶을 노래하는 곳, 바로 진정한 시의 고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100여 년 전에 어느 시인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과거형 문장에서 그의 시 정신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오늘도 시를 쓰고 있다는 현재진행형 내지는 미래형 문장이 된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닌 ‘살아있는 시인의 사회’라는 말이다.
여기에 숨어있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있다. 이번 시인학교와 시집발간은 보은 행복 교육지구의 사업지원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회인초중학교, 대청댐노인복지관, 해바라기 작은도서관, 해바라기 문화공작소 등이 함께 힘을 모아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청댐노인복지관에서는 시를 배우려는 어르신들의 참여를 위해 매일 네 분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와서 수업에 참여하게 했고 회인중학교에서는 시집발간을 위한 비용까지 일부 부담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종의 ‘회인 교육문화공동체’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함께 힘을 모으고 시스템으로 만들면 더 오래 가는 법이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회인을 시의 고장, 역사문화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래서 내가 사는 회인이 열 살 어린아이부터 아흔이 넘은 어르신들까지 각자의 삶을 시로 나누는 사회,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동요, 영상, 축제 등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담아내며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회, 바로 ‘살아있는 시인의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