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과 이른 가을 사이, 높은 하늘을 배경 삼아 부침개만큼이나 커다란 얼굴을 매달고 있는 꽃, 꽃이라기에는 좀 부담스러울 정도의 키와 크기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단숨에 잡아끄는 녀석이 바로 해바라기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울타리 밑에 몇 포기씩 심곤 했는데 꽃도 꽃이려니와 아마도 고소한 씨앗이 훌륭한 주전부리가 되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이 해바라기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다. 우선 꽃이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는 생각. 이름이 해바라기인 데다가 생김새도 해를 닮았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를 따라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를 따라 움직이는 향일성 식물인 것은 맞지만 어린싹과 여린 새순이 그렇다는 의미이지 다 자란 꽃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단지 해를 최대한 많이 보려고 높게 자라 남쪽을 향할 뿐이다.
두 번째 오해는 커다란 꽃송이 중에서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붙어있는, 혀를 닮은 노란 부분이 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이 부분도 꽃인 건 맞지만 실제로 씨앗을 맺는 꽃, 그러니까 암술과 수술이 있어서 생식기능이 있는 유성화는 여러 개가 가운데에 모여있는 관 모양의 작은 꽃들이다. 바깥 부분의 꽃잎들은 벌들을 모으기 위한 가짜 꽃, 광고판일 뿐이다.
세 번째 오해는 해바라기 씨에 관한 것이다. 꽃의 암술 밑에는 씨방과 밑씨가 있는데 수정이 되면 씨방은 열매가 되고 밑씨는 씨앗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까무잡잡한 해바라기 씨는 씨방이 자라서 된 것이니 정확히 말하면 열매다. 껍질처럼 보이는 열매를 까면 안에 보이는 통통한 육질 부분이 씨앗이다.
마지막 오해는 해바라기가 권력과 이익만 좋아 신념 없이 움직이는 변절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설혹 움직인다 해도 그건 환경변화에 따라 몸을 바꾸어 적응한다는 뜻이니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훌륭한 생존전략이다. 환경이 변했는데도 적응하지 말고 과거를 고집하라는 것은 봉건사회 지배층에게나 유리한 복종의 가치관일 뿐, 개체와 종 전체의 생존 번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이 변절을 의미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해라는 중심점을 놓치지 않고 고집한다는 뜻이니 그건 지조이지 변절은 아니다.
해바라기에 관한 사소한 오해들을 바로 잡았다면 이번에는 최신 정보로 우리의 상식을 업데이트할 차례다. 9월 30일, 바로 내일 회인에서 ’ 해바라기를 품은 축제‘가 열린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은 어떨까. 사실 몇 년 전부터 회인에 오장환의 시 ‘해바라기’에서 이름을 따온 ‘해바라기 작은도서관‘, ’ 해바라기 문화공작소‘, ’ 해바라기 청년공동체‘ 등이 슬금슬금 생겨나고 있었다. 바로 오장환 시인의 출생지라는 장점을 살려 회인을 시인의 고장으로 만들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 단체와 교육문화 관련 기관들,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시인학교를 열어 시집을 내고, 출간기념회를 겸한 시축제까지 열게 된 것이다. 회인 사람들의 꿈은 작지 않다.
해마다 시인학교를 통해 주민들과 외지인들이 시를 써서 시집을 내고, 전국의 시인들과 시를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함께 그림, 노래, 미술, 영상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로 시를 즐기는 시 문화축제를 열고자 한다. 100년 전 천재 시인을 자랑만 하는 ’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시를 쓰고 즐기는 ’ 살아있는 시인의 사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서 먼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외부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구감소와 농촌 소멸에 대응해보겠다는 다소 원대한 꿈도 지니고 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시축제의 부제가 ’ 해바라기, 시가 싹트다 ‘이다. 시인의 고장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운 해바라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내년에는 커다란 꽃을 피우기를, 그래서 회인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좋아하는 시의 고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