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을 받으며 아내와 산책을 한다. 웬만한 풀들은 된서리 몇 번에 대부분 얼어 죽었고 화려하던 참나무와 튤립나무 단풍들도 바싹 마른 채 길에 나뒹군다. 늦가을, 아니 초겨울의 정취가 제법 그럴듯하다. 그런데 흉물스럽게 얼어 죽은 풀들 사이로 아직도 파릇한 줄기와 하얀 꽃을 피운 녀석이 눈에 띈다. 땅에 붙어 겨울을 나는 냉이도 아니고 껑뚱한 키에 혼자만 멀쩡한 너는 도대체 뭔가 싶어 다가가 보니 흔한 잡초, 개망초다.
개망초, 그 이름부터가 망측스럽다. 하도 억세고 없애기 힘든 풀이라서 우리 선조들이 ‘망할 놈의 풀’이라는 원망의 뜻으로 불렀다는 ‘망초’, 그런데 여기에 ‘개’라는 접두사까지 덧달린 풀이 개망초다. 개살구, 개나리, 개다래, 개옻……. ‘개’는 주로 식물에 붙는데 원판 식물보다 작거나 볼품없고 허접한 식물에 쓰는 말이다. 약간은 짝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진짜도 아닌 것이 그런 척한다는 느낌을 담고 있는 접두사이니 결국 천한 것 중에서도 천한 풀이 바로 개망초인 셈이다.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개망초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그런데 볼품없는 이름의 이 개망초에는 뜻밖의 반전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숨겨져 있다. 우선 첫 번째 반전은 이름과는 달리 꽤 예쁜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국화과의 다른 꽃들도 그렇지만 개망초는 가운데의 노란 관상화와 주변부의 하얀 설상화로 이루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계란 프라이를 닮아서 계란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꽃이 크거나 향기가 진한 것은 아니지만 여럿이 모여서 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많은 계란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제법 감탄을 일으킬 정도다. 누가 일부러 가꾼 것도 아닌데 들판이나 밭두렁에서 저 혼자 힘으로 멋진 꽃밭을 이룬 모습이 대견하다 못해 고맙기까지 하다.
두 번째 반전은 개망초가 원예식물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아무 밭이나 둑에서 흔하게 자라다가 농부의 손에 사정없이 뽑히거나 독한 제초제를 맞고 흉물스럽게 말라 죽는 잡초지만 원래는 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부러 길렀다는 말이다. 일본의 식물학자가 쓴 책, ‘풀들의 전략’을 읽어보니 개망초는 원예용으로 북아메리카에서 일본으로 들여왔단다. ‘핑크 프리베인’이라는 귀티 나는 이름을 달고서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집 밖으로 버려진 것이 강한 자생력으로 살아남아 지금의 개망초가 되었단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가 일제강점기임를 고려하면 일본인, 혹은 일본인 흉내를 내고 싶은 조선사람에 의해 원예용으로 들여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거나 개망초의 본래 신분은 천한 잡초가 아니라 정원에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귀하신 꽃이었다니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반전이 있다. 바로 개망초가 제법 맛있는 봄나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른 봄에 개망초를 데쳐서 양념해 놓으면 뜻밖에 향기롭고 식감도 좋다. 그 흔한 잡초가 이렇게 맛이 좋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한방에서는 개망초를 일년봉(一年蓬)이라 하여 열을 내리고 독을 풀어내는 약재로도 쓴단다. 맛있고 몸에 좋고 예쁜기까지 한데 천한 이름을 지녔으니, 묘한 궁금증과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풀이다.
사람들의 천시에 억울해하거나 기죽을 만도 하련만, 그러나 개망초는 사람들의 평가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 없이 입동도 소설도 지난 계절 속에서 꿋꿋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과연 저 꽃이 씨앗을 맺을 수는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는 해도 본격적인 겨울이 오면 얼어 죽을 테고 무엇보다 벌과 나비들이 이미 영업을 끝냈으니 수정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안될 거 왜 꽃을 피우느냐고,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뭐 씨를 맺어야만 성공일까, 아니 꼭 성공하기 위해서만 사는 걸까? 남들의 평가나 성공 여부에 개의치 않고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도 나름 멋진 삶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내가 개망초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