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km, 짧지 않은 거리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대충 400km라니까 서울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 옛날식으로 계산하면 2000 리쯤 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는 걸로 봐서는 우리 조상들이 생각하는 아주 먼 거리가 1000 리였나 보다. 그 두 배인 800km를 온전히 두 발로 걷는다는 건 사실 실감하기 어렵다. 일주일쯤 걸었는데 아직 산티아고까지는 650km가 남았단다. 걷는 과정이 중요하지 목적지에 빨리 가는 게 목적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사실 좀 지루하고 겁도 난다.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다행인 것은 아직 발에 물집이 생기지도 않았고 무릎이나 발목이나 어느 곳 한 군데 문제는 없다는 점이다. 아침이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서 습관처럼 짐을 챙기고 배낭을 부치고, 신발을 챙겨 신고 길을 나선다. 정해진 길만 따라가면 비슷한 듯, 다른 풍경들과 사람들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나고 지루해질 무렵이면 예약한 숙소가 나타날 것이다. 뭔가를 결정하느라 고민할 일도 없고 내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순간순간을 느끼고 즐기며 걷기만 하면 된다.
순례와 여행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여행은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알려진 곳을 일부러 찾아가서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쇼핑도 한다. 재미있지만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뭔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를 갈까, 무얼 타고 가나, 입장료가 비싼데 들어갈까 말까, 여긴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사진은 어디서 찍을까, 무얼 먹을까......, 등등. 순례는 다르다. 코스가 정해져 있으니 고민할 것도 없고 숙소도 그 길 어디쯤에 나타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또 하나, 주변에 크고 작은 역사유적과 볼거리가 지천이지만 그걸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고 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며 지나친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사진 찍으면 그건 여행이지 순례가 아니다. 외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것, 아니 최소한 외부와 내부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것, 순례는 애초에 여행과는 결이 다른 행위다.
산티아고 순례길 대부분은 평원과 완만한 산길과 오래된 마을을 지나는 아름다운 길이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때로는 고속도로나 찻길 옆으로 자동차 소음을 들으며 걷기도 하고 때로는 번잡한 도시에서 표지판을 찾느라 애를 먹으며 걷기도 한다. 오늘 걷는 길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구간이다. 로그로뇨라는 도시를 통과하는 구간인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나타난 도시가 반갑기도 했다. 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 모퉁이에서 노천 테이블에 앉아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자동차의 소음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활기 차 보였고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서 도심과 공장지대와 도시 외곽의 주택가를 지나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좀 쉬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카페에 들러야 하는데 그 흔한 카페도 보이지 않는다. 세 시간쯤? 어쩌면 그보다 짧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주 긴 시간으로 느껴지는 시간을 힘들게 걸어서 도시를 벗어난다. 드디어 길가에 파릇한 풀들이 보이더니 아스팔트 도로 옆으로 흙길이 나타난다. 반갑다. 순례길 까미노가 이렇게도 소중한 존재였구나.
말이 나온 김에 화장실 얘기 좀 하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불편을 느낀 점이 바로 화장실이 없다는 거다. 하루 종일 길을 걸어도 화장실은 없다. 그냥 길에서 눈치껏 해결해야 한다. 산길 오솔길에서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는데 넓은 벌판 길에서는 이 ‘눈치껏’이 쉽지 않다. 뒤에 오는 순례자가 없는지, 있더라도 충분히 먼 거리인지를 미리 판단해야 한다. 혹시라도 길을 걷다가 용무 중인 순례자가 보이면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매너도 필요하다. 그나마 우리 부부가 방문한 기간은 순례자가 적은 비수기라서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순례자가 모인다는 봄과 가을에는 어찌 해결하는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주택가나 도시지역도 화장실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우리나라에서는 어디 가나 있는 깨끗한 공중화장실, 도시에서는 빌딩마다 있는 열린 화장실이 스페인에는 없다. 화장실을 쓰려면 꼭 카페나 바에 들어가서 하다못해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한다. 우리 부부는 하루 최소한 2-3번 이상 카페에 들르곤 했는데 대부분은 화장실 때문이었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순례를 마치고 도시여행을 하면서는 슈퍼마켓의 화장실을 50센트씩 주고 이용한 적도 있고 심지어 기차역에 딸린 화장실까지도 입장료를 내야했다.
세르베차 그란데 한잔에 눈이 풀렸다
닭고기 빠에야(Paella)
투덜대며 로그로뇨를 벗어날 무렵, 다리 쉼도 할 겸 레스토랑에 들렀다. 휴일인지, 순례자는 별로 보이지 않고 가족단위로 나들이 나온 주민들이 북적거린다. 우리 부부가 한국사람 입맛에 딱 맞은 음식, 빠에야를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다. 여느 때처럼 노천 테이블에 앉아 햇살과 사람들의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쎄르베차, 생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레스토랑 입구에 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이 실려 있는데 마치 프라이팬에 김치볶음밥처럼 생겼다. 중간중간 닭다리나 새우가 섞여 있는 것만 빼고는 영락없이 볶음밥이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빠에야란다.
나는 닭고기 빠에야, 아내는 해물 빠에야를 시켰다. 맛은 아주 조금 매큼하고 살짝 짭짤한 게 딱 입에 붙는다. 음, 이런 음식이 있는 걸 몰랐군. 가격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충 12-20유로선, 단품 요리 치고 그리 싼 가격은 아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우리가 아는 김치볶음밥보다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요리다. 밥에다가 양념과 고기를 넣고 볶는 게 아니라 채소와 고기, 소스를 올리브유로 볶다가 쌀을 넣어 밥을 짓는단다. 정성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요리다. 어쨌든 이날 이후로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면 빠에야를 먹었는데 한 번도 실망한 적은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스페인 요리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미 말했지만 주로 먹는 순례자 정식은 대충 빵과 수프, 닭이나 양고기 혹은 쇠고기 등의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마지막으로 요구르트나 달달한 디저트가 기본 구성이다. 여기에 와인이나 음료수가 포함되고 채소 샐러드는 별도의 값을 내야 한다. 보통 12유로 선. 지역에 따라서 특별한 메뉴가 나오기도 하고 나중에 순례를 마치고 도시 여행을 하면서는 좀 더 다양한 요리들을 먹기도 했지만 순례자 정식은 부족함 없이 입에 맞는 훌륭한 메뉴였다.
점심으로는 보까띠요를 주로 먹는데, 이건 겉바속촉한 바게트의 배를 갈라 속에 토마토, 감자, 치킨, 채소 등의 속을 넣는다. 한국에서 흔히 서브웨이라고 부르는 빵과 비슷한데 좀 더 크고 빵이 바삭한 것이 다르다. 가격은 대충 5유로쯤. 입맛에도 맞고 양도 많아서 여기에 2유로짜리 커피 한잔을 더하면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다. 물론 점심은 이보다 더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다. 슈퍼마켓(수뻬르 메르카도스라 한다)에서 바게트나 호밀 빵 등을 사서 과일 한 두 개와 요구르트를 함께 배낭에 챙겨 넣고 출출할 때 길 가에서 간단히 먹을 수도 있다. 3-4유로면 끝이다.
34일간 까미노를 걸으면서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은 없다. 스페인 음식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잘 맞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행에 관한 나의 평소 지론이 있다. 가능하면 현지 식으로, 현지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