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하고 쾌청한 날씨, 오늘도 순례를 시작한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간식거리로 빵과 쿠키를 준비했다. 중간에 카페나 알베르게에서 간식을 할 수도 있지만, 마을이 없는 구간에서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경우에는 대책이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초콜릿이나 캔디를 준비하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빵, 그것도 바삭한 바게트가 편하다. 배고플 때 뜯어먹고 남는 것은 도로 배낭에 넣어두면 하루 이틀 정도는 훌륭한 비상식량이 된다. 건널목을 건너고 주유소를 지나고, 주택가 언덕길을 지나 도시를 벗어난다. 모든 것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시작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아침, 도시를 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갑자기 4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온 것이다. 그럴 수도 있거니 지켜보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마치 거품이 올라오듯 묘한 감정이 올라온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일 학년인 1976년, 예순일곱의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보다 3년 전인 중학교 1학년 때 경기도로 이사를 가셨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충주에 남아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렸을 때의 모습뿐이다.
내 아버지는 좀 마르신 체구에 성질이 급한 편이셨다. 급한 성질에, 약한 체력으로 늦자식들을 조롱조롱 키워대며 5천 평 사과농사를 짓는 게 당신에게는 무척 힘에 부치시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부장적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으니 여차하면 식구들에게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성질 급한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형제들이 올망졸망 모여 놀다가도 아버지가 섭아! 하고 안방에서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소리와 동작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긴장을 한다. 그 섭이가 어떤 섭인지, 네 명의 섭이들로써는 참 알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지금의 상황과 느낌으로 이건 담배 심부름이니 막내인 웅섭이 차례구나 판단이 서는 순간 네!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 앞에 대령하곤 했다. 만일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두 번째 "섭아"소리가 떨어질 것이고 그래도 대답을 안 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막내 사랑은 좀 심할 정도의 편애에 가까웠다. 쉰 하나의, 당시로서도 드물게 늦게 본 막내아들. 거기에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입이 짧아 다리가 새처럼 가느댕댕 하고 보니, 말하자면 안쓰러워서 그리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초등학교 4학년까지 집에서의 내 호칭은 ‘애기‘였으며, 여차하면 엎자고 돌려대는 아버지의 등짝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겨우 졸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밥상에서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쌀밥을 나눠 먹었고 이틀에 한 번꼴로 암탉이 낳은 계란을 뜨거운 밥과 간장으로 비빈, 당시로서는 귀한 계란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아버지와 나뿐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의 친구이자 장난감이었다.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아버지의 눈길을 받으며 과수원에서 뛰어놀았고 가끔은 아버지의 무릎이나 등짝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까끌까끌 턱수염을 문질렀고 코며 귀를 잡아당겼다. 남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가 나에게는 화를 내거나 야단치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유식하고 위대한 존재였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항상 아버지에게 물었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척척 답을 해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늘 어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버지의 나이가 많고 워낙 경우가 밝아서 여차하면 잘못을 지적당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보리밭 사이로 은근히 데려가시더니 노랗게 익은 개똥참외를 따서는 무릎에 쓱쓱 닦아 내미시는 게 아닌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참외 하나를 다 깨물어 먹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셨다. 햇볕에 뜨끈해진 개똥참외는 달고도 풋풋한 맛이 났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왠지 형제들에게 말해서는 안 될 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일 듯싶었고, 어쩌면 이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스쳤던 것도 같다.
그런데 충주의 과수원을 팔고 땅값이 싸다는 경기도 연천으로 이사를 가신 아버지가 그만 위암에 걸리셨다. 의료보험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의술이 지금처럼 발전한 것도 아닌 45년 전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 후 2년 남짓 병으로 고생하셨고 그런 아버지를 나는 방학 때나 가서 뵙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으로 힘들어하셨고 나는 과수원으로 강으로 놀러 다니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버지와 놀거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프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를 키운 건 어머니셨다. 충주에서 대전으로, 보따리 장사에 고물장사까지 하시면서 막내아들 뒷바라지를 하신 어머니. 덕분에 나는 비교적 탈 없이 잘 자라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고 어머니는 내가 PD가 되고 2년 만에 중풍을 얻어 9년 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미안함이 가슴 깊이 자리 잡았고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라는 단어 하나에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핑 도는 평생 불효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먼 스페인에서 어머니가 아니고 갑자기 아버지가 올라온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별다른 빚이 없다고 생각했다. 풋풋한 개똥참외와 유산으로 남기신 555평의 민둥산이 아버지의 사랑을 짐작케 하지만, 어린 시절 이후 내 인생에서 아버지가 큰 의미를 지닌 적은 없었다. 아버지 없이도 사춘기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그럭저럭 마쳤고 군에도 다녀왔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길렀다.
그런데 아들을 낳아 기르면서 문득 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생각한 것이다. 내가 아들을 바라보듯이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셨으리라. 내가 아들을 아끼듯이 아버지도 나를 아끼셨으리라. 내가 아들을 안아주고 놀아 주듯이 아버지도 그러고 싶으셨으리라. 워낙에 아버지의 권위와 체면이 중시되는 시절이다 보니 표현을 못하셨을 뿐이리라.
그런 막내아들이 우등상도 받고 반장도 하고, 당시로서는 명문이라는 고등학교도 입학하니 또 얼마나 대견하셨을까? 어쩌면 더 지켜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시는 것이 서운하셨을까, 미안하셨을까?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왜 나는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을까?
감정이 격해진다. 작은 공기 방울인 줄 알았는데, 올라 와 보니 태풍이었다. 나는 순례 중이었고 아침이었고 도시를 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옆에는 아내가 있고 조금 떨어져서는 다른 순례자들도 보이건만, 나는 이유 없이 바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