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하는 순간, 꼬리를 잡혔다. 우리 부부보다 이틀 뒤에 출발한 그룹을 드디어 만났다. 여느 때처럼 바람이 설렁설렁 부는 평원을 걷는 중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70대 초반의 남자 한 분이 뒤에서 다가오는데 딱 봐도 한국 사람이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는 빠른 걸음으로 평원을 건너간다. 뒤이어 한 명 한 명 나타날 때 마다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부부를 추월해 간다. 대단한 그룹이다. 하긴 이 정도로 잘 걸으니 이틀이나 앞 선 우리를 10일 만에 따라 잡았겠지. 동갑내기 여자 한 분을 만나서야 겨우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30명 쯤 되는 그룹으로 연령대는 다양한 데 주로 60대 이상이 많다.
드디어 꼬리를 잡혔다고 표현한 것은 사실 이들 그룹이 뒤쫓아 오는 걸 미리 알았다는 말이다. 그 얘길 잠시. 4일차 쯤 됐을까? 오래된 어느 마을의 가게 앞에서 빵과 음료수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는 중이었다. 20대의 한국 남자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우리보다 이틀 늦게 생장에서 출발한 단체 순례자 30여명이 뒤 따라오고 있단다. 자신은 그룹으로 걷는 게 싫어서 얼른 치고 나가는 중이란다. 그리 빨리 걸어도 괜찮겠냐고 걱정을 해 주었더니 자신은 체육대학생이고 워낙 잘 걸어서 문제없단다. 급히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마치 경보선수처럼 빠르다. 과유불급에 욕속부달이라, 앞으로 내게 비슷한 일이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이 친구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르고스인지 어디쯤 까지 걷다가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겨서 목발을 짚고 걸었단다. 어쨌든 이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언젠가는 그룹 순례자를 만나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하기야 처음에 같이 걷던 외국순례자들, 한국 순례자들도 거의 우리 부부를 앞질러 가 버리고, 이제 눈에 띄는 친구들은 새로운 얼굴들이다. 우리 부부가 천천히 걷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속도를 더 낼 생각도 없고 더 많은 시간을 걸을 생각도 없다. 하루 22-23km를 기준으로 대략 6시간 쯤, 중간에 쉬고 밥 먹고 하다보면 대충 3시에서 4시 사이에 다음 숙소에 도착한다. 여기서 한두 시간 더 걷는 다는 건 무리다. 이날부터는 한국 단체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례를 함께 했고 우리 부부가 하루 이틀 정도 늦게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드넓은 평원 사이로 걷는다지만 사실은 황무지가 아니다. 뭔가 심는 경작지인데 수확이 끝나서 황무지처럼 보이는 거다. 궁금해서 살펴보니 주로 밀이 많고 지역에 따라서는 해바라기도 제법 있다. 떨어진 씨앗이나 대궁이로 짐작한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밀과 해바라기가 이 넓은 평원을 끝없이 채우고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일까? 잠시 컴퓨터 그래픽으로 푸른 밀밭, 황금색 밀밭, 노란 꽃이 핀 해바라기 밭으로 차례로 바꾸어본다. 상상인데도 숨이 멎을 것 같다. 그래, 다음에는 푸른 밀밭 길로 걸어보자. 5월 말쯤, 그까짓 거 사람 좀 많으면 어떤가?
지역에 따라서는 포도밭도 많다. 앞서 말했듯이 수확하다 남겨 둔 포도송이들이 가끔 있어서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 포도가 한국에서 먹던 포도와는 사뭇 다르다. 일단 포도송이와 포도 알이 훨씬 작다. 한국의 머루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작지만 당도가 훨씬 높다. 입에 넣으면 씨는 씹히지 않고 단 맛이 가득하다. 한국에서 먹는 먹포도의 시고 단맛의 조화로움에는 비할 수 없지만 피로회복제로는 으뜸이다. 이렇게 당도가 높으니 달고 맛있는 포도주가 생산되는구나 싶다. 한 번 맛본 후로는 포도 중독이 돼 버렸다. 길을 걷다가 포도밭이 보이면 습관처럼 힐금힐금 눈길을 주며 걷는다. 길 가까운 곳에 남아있는 포도송이를 탐색하는 거다.
수확을 앞둔 올리브, 픽사베이 다운로드
열매가 달려있고 수확을 앞 둔 과일도 있다. 잎은 마치 버드나무와 흡사한데 과일은 대추만한 것이 약간 먹포도 색이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이라서 물어보니 그게 바로 올리브란다. 흠, 올리브, 처음 보는데도 왠지 잘 아는 녀석 같다. 지중해성 기후에 잘 자라고 기름은 샐러드에 뿌려먹거나 각종 요리에 쓰기도 하고, 뭐 마트에서 몇 번은 사다 먹은 기억도 나고......, 그런데 네가 이렇게 생겼구나. 궁금해서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윽, 쓴 맛이 가득하다. 분명 색깔은 진한 보라색으로 수확할 때 쯤 된 것 같은데 아직 수확시기가 안 됐는지 원래 이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쓰다. 순간 프랑스 출장길에서 코디한테 속아 마로니에 씨앗을 깨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익숙한 듯 처음 보는 녀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아몬드다. 아몬드야 초콜릿 속에도 들어있고 맥주 안주로도 먹고 흔하게 보는 견과류인데 막상 나무에 달려있는 아몬드는 스페인에서 처음 봤다. 아몬드는 마치 복숭아처럼 생겼다. 가느다란 잎은 복숭아 잎과 비슷하고 열매도 딱 길쭉한 개복상이다. 익으면 과일이 갈라지면서 씨가 튀어 나오는데 그 씨를 깨면 안에 속 씨가 나온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몬드다. 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아몬드 나무가 있고 아몬드 나무 밑에는 앞선 순례자들이 남겨놓은 돌멩이가 놓여있다. 요걸로 톡톡 깨서 먹으면 된다.
유칼립투스, 껍질이 저절로 벗겨진다.
기억에 남는 나무가 한 가지 더 있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서 숲길에서 자주 만나는, 키 크고 곧게 자라는 나무. 잎은 버드나무 잎처럼 생겼는데 수피는 마치 낙엽송처럼 진한 갈색의 거친 피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무가 자라면서 이 수피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벗겨져 떨어진다는 거다. 그렇게 수피를 떨어뜨리고 나면 속에서 연초록색의 매끈한 새로운 수피가 나온다. 수피가 벗어지고 있는 나무를 멀리서 보면 갈색과 연초록색이 마치 수채화 붓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린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게다가 곧게 자라니 건축자재로는 으뜸이겠다 싶다. 나중에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이름을 알아냈다. 마침 공원에 아주 큰 고목나무가 있고 이름이 쓰여 있기에 들여다봤다. 유칼립투스. 오호, 네가 바로 코알라가 먹는다는 유칼립투스로구나.
여행이라는 게 보는 사람의 관심분야에 따라서 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싶다. 건축가에게는 집과 성당들이 보일테고 역사학자에게는 유적이 보일테고 지리학자, 생물학자, 음악가, 요리사......, 모두에게 보이는 스페인은 조금씩 다른 모습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보고 싶은 대로 보인다는 말이 더 맞을것도 같다. 똑 같은 코스를 여행하고 나서 열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열 가지의 조금씩 다른 파노라마를 펼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일상도,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시대, 비슷한 조건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선택하는 일상과 삶이 천차만별, 제 각각이다. 이건 사실 마법에 가깝다. 비슷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정된 셋트 위에서 수많은 배우들이 각자의 시나리오로 각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고 있다는 점 말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하고 서로가 조연이 돼 주기도 하면서. 물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아내와 나도 서로 각자의 영화를 찍고 있으리라. 비슷하지만 다른 색조의 영화, 그 영화에서 내 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