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슷한 시간에 길을 떠나 비슷한 길을 걷는다. 눈에 걸릴 것 없는 넓은 평원 사이로 곧게 뻗은 까미노 길을 아내와 단 둘이 걷는다. 순례자들이 많이 줄었다. 길에서 가끔 순례자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출발할 때처럼 그룹으로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을을 지나칠 때면 오래된 집들과 성당을 당연하게 만나는데 이젠 그리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녹아든 느낌, 동화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그라뇽이라는 마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오래된 성당 하나가 나타난다. 돌을 잘라서 벽돌처럼 쌓았는데 돌 벽돌의 색깔이 붉거나 진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는 걸로 봐서는 여러 번 보수한 듯, 한 마디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성당이다. 웬만해서는 눈길만 주고 지나치련만,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공간이 넓지는 않다. 천정은 높고 나름 화려하지만 신도들이 예배를 보는 공간은 몇십 명 정도가 앉을 정도다. 한국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미리 말하자면 아내는 개신교,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기공과 명상수련을 조금 맛보면서 이름이 무엇이든 영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믿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믿는다는 표현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애매한 상황에서 그렇다고 믿는다는 것이니, 뒤집으면 잘 모르겠다는 말과 같다.
라디오를 틀면 소리가 나고, 우리는 전파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전파를 믿지는 않는다.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과 앎의 문제다. 영적인 존재가 실재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드린다. 마치 남의 집에 가면 그 집의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듯이 말이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에게, 절에 가서는 부처님에게, 산에 가서는 산신령님에게 인사를 드린다. 무사히 산행을 허락하신 것에, 건강하게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나와 가족의 일상에, 이번 같은 경우는 30년 만의 휴가로 순례길을 내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말이다.
그렇게 감사 인사나 드리려는 참이었다. 딱딱하지만 경건한 나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이건 신과 대하는 기본자세다. 마치 어른을 뵐 때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과 같다. 한 호흡 한 호흡 몸을 이완하고 중심을 모았다. 눈앞에 빛이 어른거린다. 흠, 이건 호흡이 제법 깊어져야 나타나는데 오늘은 어째 이렇게 빨리 보일까, 하는 순간 황금빛이 머리 위에서 내 몸을 감싼다. 이럴 때 호들갑을 떨면 안 된다. 감사한 마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호흡에 집중하며 바라본다.
빛 속에 머문다.
평화롭다.
안전하다.
어떤 것도 잘못되지 않는다.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다.
존재와 차원을 뛰어넘은 듯,
마치 빛과 내가 하나가 된 듯,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확신.
그래, 어쩌면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완벽했다.
완벽하지 못한 나의 믿음이 불신과 불안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아들에 대한 걱정도,
은퇴자로 어찌 살아야 하나 답을 얻자는 것도,
내가 벽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 만들어 낸 착각일 뿐이다.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삶과 순례와 호흡을
그렇게 이어가면 될 뿐이다.
우연히 들른 그라뇽의 성당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온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기쁨의 눈물과도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뭔가를 갈구하고 헤매다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흐를 법한, 혹은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서 엄마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았을 때 그냥 흘러내리는 감사와 안도의 눈물이다.
성당을 나온 아내가 대견해하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뭐야, 나이롱이 혼자 은혜 다 받네"
10년이 넘게 아내를 따라 듬성듬성 교회를 나가면서도 침례조차 안 받다가 자퇴해버린 나를 나이롱 신자에 빗댄 것이다.
"그렇네, 근데 나 나이롱 아녀. 삼베여"
그래, 나는 나이롱보다는 무명, 혹은 삼베에 가깝다. 나이롱은 비단인 척 비단이 아닌 짝퉁이라는 뜻지만, 나는 한 번도 비단인 척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 나이롱도 괜찮다. 비단은 돈 많은 몇 사람만을 위해 쓰이지만 나이롱은 누구나 사 입을 수 있는 고마운 물건 아닌가.
예약한 숙소에 들어가니 순례자들이 제법 많다. 앞에서 말한 젊은이 그룹들도 모두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이들은 로그로뇨에서 하루 여행하고 다시 순례를 한단다. 덕분에 느림보 우리 부부를 다시 만난 것이다. 모두들 반갑다.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다.
이곳은 돼지갈비가 유명하단다. 사실은 어제 숙소에서 단체 순례를 이끌고 있는 여행사 직원에게 정보를 얻었다. 조금 일찍, 세시쯤 숙소 2층의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돼지갈비와 새우구이, 샴페인을 시켰다. 새우구이는 신선한 새우를 소금에 구운 듯, 짭짤하고 향긋하다. 그런데 내 취향은 아무래도 돼지갈비다. 30cm쯤 되는 쪽갈비를 구워 소스를 뿌린 후에 바삭한 토핑을 얹었는데, 육질도 부드럽고 양념 맛이 자연스럽게 새콤 달콤, 맛이 풍부하면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작고도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식사에 상큼한 샴페인을 마시며 아내와 품위 있게 저녁을 먹는다. 그동안 힘들게 걸어온 노고가, 아니 고급 레스토랑 한 번 가 본 적 없이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이 화려한 저녁식사로 다 보상받는 느낌이다. 행복하다.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한국 젊은이들이 함께 저녁을 먹는다. 우리처럼 돼지갈비와 새우튀김에 와인을 곁들인, 비슷한 메뉴인 것 같다. 분위기에 취해서 일까?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저 쪽 테이블 내가 낼까?”
“그래, 좋아”
아내의 답은 짧고도 즉각적이다. 사실 나는 쩨쩨한 좁쌀영감이고 아내는 통이 크다.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캠핑 카라반을 사거나 집을 짓거나, 무얼 해도 나는 조막손이고 아내는 손이 크다. 그렇다고 아내 본인을 위해서 사치를 하거나 비싼 물건을 사는 경우는 없다. 써야 할 때 쓸 줄 아는 거다.
조막손인 내가 통 크게 저녁 값을 내려고 마음먹은 것은 사실 딸내미 때문이다. 딸이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갑자기 1년간 해외여행을 하겠단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지만, 꼰대 소리를 듣기는 싫어서 그러라고 했다. 조건은 여행 경비의 반은 네가 벌어서 조달하면 나머지 반을 대준다는 거였다. 결국 딸은 6개월간 카페에서 알바를 했고 6개월간 인도로 터키로 요르단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귀국이 가까워질 무렵, 이집트에 머물고 있던 딸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집트에서 다이빙을 배우는 중인데, 너무 행복해서 1년간 더 머무르고 싶단다. 일단 복학을 하고 나중에 다시 가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지만, 자기주장이 확고한 딸을 이길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결국은 타협을 했다. 귀국해서 다시 6개월간 알바를 하고 이집트로 떠났다.
딸은 나중에 귀국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5년째 일본에서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다. 크게 성공을 했다거나 잘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한 길을 꿋꿋이 살고 있다. 되돌아보면 그때 딸을 억지로 주저앉히지 않은 게 참 잘한 일이다 싶다. 2년간의 여행을 통해서 어쩌면 딸은 평생을 꿋꿋하게 살아갈 힘을 얻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딸이 인도인가 터키를 여행하던 중에 어떤 한국인 의사 부부를 만났단다. 그리고 어느 날 두 부부에게서 맛있는 식사를 거하게 얻어먹었단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딸이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고 그 말을 들은 나도 고마웠다. 몇 푼 안 되는 여비로 값싼 것만 먹으면서 여행했을 딸에게, 그 한 끼 식사가 얼마나 큰 힘이 됐겠는가? 어쩌면 지치고 외롭고 배가 고팠을지도 모를 딸에게 맛있는 밥을 사 준 부부, 내가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아들, 딸들에게 밥 한 끼 사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젊은이들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는 눈치다. 자기들도 돈 있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단다. 나는 알 듯 모를 듯 짧은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