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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듯이

로드 에세이

by 심웅섭

18. 구름에 달 가듯이

벨로라도 – 오르떼가 10월 30일



길을 걷다 보면 가끔씩 묘비명을 만난다. 대부분 이름과 국적, 사망한 날짜 등이 간략히 적힌, 소박하기 그지없는 묘비명이다. 실제로 시신이 화장되어 그곳에 모셔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보면 왠지 짜안하고 애절한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어쩌면 불치병에 걸려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순례를 택한 것일까, 점점 더 커지는 통증을 삶의 무게처럼 짊어지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다가 쓰러졌을까, 아니면 나처럼 인생의 휴가로 가볍게 걷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까.


사연이야 어찌 됐든 순례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꽤나 그럴듯해 보인다. 병원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이런저런 기구들을 줄줄이 달고 맞이하는 죽음, 세상에서 버림받았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차가운 집에서 외롭게 맞이하는 죽음, 혹은 아내와 자손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편안히 맞이하는 죽음, 그 어떤 죽음보다도 순례 중에 죽는다는 것이 멋져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걷다가 죽어서 그 길에 잠들고, 수많은 발길과 눈길들이 찾아주는 까미노에 묻혔으니 어쩌면 행복한 죽음이구나 싶은 것이다. 묘비명을 보며, 잠시 발을 멈추는 것으로 애도를 표한다.

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무덤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낡은 신발들을 돌 위나 나무, 혹은 전봇대에 매달아 놓은 신발 무덤들이다. 다른 곳이라면 지저분하고 볼썽사납게 느낄 수도 있는데, 까미노에서는 느낌이 다르다. 몇 백 km, 혹은 그 이상을 터벅터벅 걷다가 해어진 신발을 그냥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보다는 이렇게 신발 무덤이라도 만들어 두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인 느낌이다. 신발에 대한 예의? 물건에 대한 예의?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떠오른다.


새로운 물건과 일회용품들이 넘쳐나고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까미노에서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자동차 없이 두 발로만 수 백 km를 걸으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소중하게 아껴 쓰다가 신발이나 물건이 수명을 다했을 때 그냥 휙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을까? 물건을 위해 무덤은 아니라도 마음속으로 감사와 작별의 인사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순례를 하다 보니 생태교육까지 저절로 되는구나 싶다.



한국에서 온 단체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걷는다. 그러나 같이 걷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가끔씩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거나 중간에 카페에서 쉴 때 얼굴을 보는 정도다. 화장실도 쓸 겸, 시골 카페에 들렀다. 단체 순례자 중 한 분이 쉬고 있는데 이분은 안타깝게도 발목을 다쳐서 걷지 못하고 차로만 이동한단다. 원래는 걷는 걸 즐기신다는 데, 아무래도 초반에 무리를 하셨나 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으로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한분이 지나간다. 뒷모습이 마치 춤을 추듯 너풀너풀, 혹은 날아가듯 훨훨 걷는다. 아하, 저분이 걷기에 고수로구나. 다음 마을의 카페에서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좋아서 길을 걷다가 스페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예 스페인에서 산단다. 그 후로도 순례길을 수도 없이 걸었고, 이제는 아예 알바삼아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또 순례길을 걷고 있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후회 없이 선택하고, 순례자들을 도우면서 약간의 수입도 될 테니 참 부러운 일이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하여 말을 건넸다.


“제가 아까 걷는 걸 보니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아요,

그걸 보고 시를 하나 지었는데 들어보실래요?”


그러란다.


“지평선 넘어서 순례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가이드

길은 외줄기 산티아고 800km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가이드“


아내도 여자 분도 모두 깔깔 배꼽을 잡는다.



나는 농담을 잘한다. 농담을 던지는 것은 세상을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 시선으로 보고 해석한다는 뜻이다. 남(주로 전문가, 스승, 지도자, 학자 등으로 불린다)에게 넘어가기 쉬운 주도권, 해석의 관점을 순식간에 나에게로 돌리는 행위다. 일종의 우주 비틀기, 아니면 꼬집기 정도라고나 할까? 이런 농담에는 악의가 없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나도 존중받고, 그러면서 그 속에 작거나 큰 의미가 담겨 있다면 더욱 좋다.


예정된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공립 알베르게가 있기에 고민 없이 배낭을 보냈는데, 도착해서 살펴보니 마치 강당에 이 층 침대만 다닥다닥 붙여 놓은 듯 썰렁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벽도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고 난방도 없고 머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 추워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립 알베르게도 일반인에게 위탁경영을 하는 경우가 있단다. 얼마 안 되는 숙박비로 이윤을 보려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 이해는 가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양해를 구하고 배낭을 찾아 나섰다. 불과 50m쯤 떨어진 곳에 바를 겸한 조그마한 알베르게가 있다. 문은 열렸나, 베드는 남았나, 불안한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뜻밖에 아담하고 따뜻한 공간에, 주인아저씨도 멋지다. 서글서글 착한 눈매에 적당한 수염이 희끗희끗한 게 내공도 있어 보인다. 이름을 물어보니 호세,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 남자 반은 호세란다. 4인 베드가 들어있는 방도 깔끔하다. 흠, 천국과 지옥이 한 발짝이로구나. 뒤 이어 한국 젊은 순례자 두 명이 들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편히 잘 수 있었다. 여러 번 만난 데다 벨로라도에서 저녁식사도 함께 먹었으니 친구처럼 반갑다.



스페인의 마을들을 보면서 부러운 점이 있다. 바로 바(bar)다. 우리나라에서 바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뉘앙스가 달라지긴 했지만 보통은 비싼 술이나 음료, 약간의 사치, 퇴폐, 혹은 고상함 등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만나는 바는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웬만한 마을에는 한 두 개씩 꼭 있고 가벼운 음료부터 와인이나 맥주 등의 잔술, 그리고 간식에서 가벼운 식사까지 한마디로 서민적인 음식들이 제공된다. 카페는 주로 커피나 음료수에 빵이나 과자 등 간식을 팔고, 레스토랑은 보다 전문적이고 고급 음식을 파는데 비해서 바는 그야말로 이것저것 파는 셈이다. 바의 생김새는 물론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운데나 한쪽에 칸막이가 있고 그 안에서 주인이 조리와 서빙을 한다. 뭐 한국의 카페나 휴게소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술을 잔술로 판다는 것, 그리고 계산은 마실 때마다 각자 동전으로 한다는 것 정도다. 안주와 술을 병째, 혹은 몇 병씩 시켜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고 한 사람이 계산하는 한국의 음주문화와는 다르다.



그런데 내가 부러운 것은 음주 방법이 아니다. 이 바가 지나가는 과객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나이 드신 할아버지들이 많긴 하지만 비교적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한두 잔의 음료나 술에 한 보따리의 대화로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도 옛날에는 사랑방이 있어서 모여 앉아 새끼도 꼬고 국수도 먹고 했다는데, 이젠 사라지고 사랑방을 대체할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문화라는 것이 부럽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자리 잡을 수는 없겠지만 스페인 마을마다 있는 바가 우리나라에도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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