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숙소에 어울릴법한 허름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슈퍼에서 파는 푸석한 식빵을 토스터에 구워서, 새빨간 딸기 향 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마셨다. 기부금을 넣는 통에 동전 몇 개를 던져 넣고는 길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서머타임이 해제된 덕분에 한 시간이 늦어져서 다행히 깜깜한 출발은 아니다.
크지 않은 마을을 금방 벗어나니 제법 넓은 비포장 길이 나타난다. 신작로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비포장 신작로가 많았다. 길 양쪽으로는 큰 미루나무가 서 있고, 여름이면 말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가끔씩 차가 지나가면 뽀얀 흙먼지가 사정없이 일었고,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은 길가에 서서 기다리다가 손을 들어야 했다. 버스를 타고 달리면 터덜터덜 유리창이 끊임없이 흔들렸고 손님을 태우려고 정차를 하는 사이 뒤따라오던 흙먼지가 버스를 감싸곤 했다. 흙먼지와 배기가스 냄새와 터덜거림 때문에 멀미를 했던 기억, 그래서 이런 신작로를 만나면 코끝에는 먼지와 배기가스 냄새가 맴돌고 약간의 멀미감, 그리고 그보다 진한 그리움이 함께 느껴진다.
까미노에 그려진 내 그림자, 키가 10M는 넘겠다
아침 해가 떴다. 그림자를 보고 알았다. 나와 아내 그림자가 넓은 신작로에 선명하게 그려졌는데, 아무리 봐도 10m는 될 것 같다. 160cm, 초단신인 내가 스페인에 와서 거인이 됐다. 이런 건 증거를 남겨야 한다. 평소에 나보고 키 작다고 놀린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해가 지평선 부근에 머물고 있고, 내가 걷는 방향이 딱 해를 등지고 있는 지금이 포인트다. 시간이 지나면 내 키가 사정없이 줄어들 것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고 물 마시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아내는 휑하니 혼자 가 버린다. 아내를 다시 만난 건 절벽 옆으로 난 언덕길을 30-40분이나 오르고 나서다.
스페인에 와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있다. 아내가 나보다 잘 걷는다. 한국에서는 분명히 내가 아내보다 잘 걸었다. 등산을 가도 언제나 아내를 배려하며 내가 걷는 속도를 조절했고, 가파른 산길에서는 먼저 올라서 아내를 기다렸다.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면서도 나보다는 아내 걱정을 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아내가 내 속도에 맞추느라 보폭을 조절하고, 힘들어 보이면 배낭을 대신 메고, 앞서 가게 되면 조용히 나를 기다려준다. 걷는 것만이 아니다. 밥도 잘 먹는다. 똑같은 양의 식사일 텐데 내가 버거워할 때 아내는 가볍게 접시를 비운다. 자존심이 살짝 상하면서도 기분은 좋다.
아내는 순례가 행복하단다. 첫째 가사노동에서 완전 해방이라서 좋단다. 남이 해 주는 밥 먹고 남이 정리해 준 방에서 자고, 눈 뜨면 걷고 해지면 쉬는 일상이 평생 처음 맛보는 해방이란다. 걷는 것도 그렇다. 이미 한국에서 매일 10km 정도는 걸으며 체력을 다진 탓에 하루 너 댓 시간 동안 평지를 걷는 것은 뭐 할 만하단다.
“여보, 평생 걷기만 했으면 좋겠어, 남들은 공부가 젤 쉬웠다는데
나는 걷는 게 젤 쉽네”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제 걷는 데 이골이 났나 보다. 생각해보니 스페인에 도착해서 보름간 하루도 쉬지 않고 꼬박 걸었다. 길에만 올라서면 팔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인다. 날씨는 선선하지만 햇살이 화사하다. 바람이 좀 세긴 하지만 다행히 맞바람은 아니다. 이제는 몸도 완전히 적응됐겠다, 까짓 거 속도를 좀 높였다. 늘 다른 순례자들에게 추월을 내주던 우리 부부가 이제는 추월해 간다. 흔들림 없이 늘 같은 속도로 걷던 독일 여자도, 허리가 내 가슴에 닿을 정도로 키 큰 호주 순례자 헨리도 모두들 슬슬 우리에게 뒤쳐진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에서 먼저 떠난 한국 남자를 만났다. 키 크고 잘 걷는 중년의 남자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우리 부부에게 한마디 한다.
“참 잘 걸으시네요, 제가 못 따라가겠는데요”
흠, 뭐 내가 다리가 짧긴 하지만 걷는 건 잘하지. 이래 봬도 왕년에 한 걸음 했다고......
나는 충주시의 변두리 과수원집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는 밥도 잘 안 먹고 발육이 늦어서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학교를 걸어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약한 막내아들이 학교를 다니는 게 영 불안하셨나 보다. 머리를 짚어보고 조금만 열이 나도 학교를 보내지 않았고 비가 좀 내려도 학교를 쉬었다. 덕분에 1학기 동안 결석일수 28일, ‘성실함이 요구됩니다’라는 담임선생님의 의견이 턱 하니 찍힌 통신표를 받아야 했다. 이런 아버지의 과보호 덕분에 어렸을 때 나는 스스로를 병약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동네 아이들과 몸싸움을 하는 거친 놀이를 피하게 됐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충주에는 남자 중학교가 세 개였는데 하필이면 제일 먼 학교에 배정이 됐다. 1년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어 다니고 싶어졌다. 같은 반 친구가 걸어 다니면서 굵어진 다리통을 자랑했던 것 같다. 처음에 걸어보니 40분이 걸린다. 그런데 이 거리를 늘 부지런히 걷다 보니 일 년 만에 25분으로 단축이 됐다 엄청난 진보를 이룬 셈이다.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고, 팔에 가방을 걸치고, 종아리 근육이 뻐근해지도록 먼지를 날리며 걸었다. 나는 지금도 걷기를 좋아하고 어느 정도 자신도 있는데 이때 걸었던 경험이 큰 밑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약골이라는 아버지의 설정을 벗어난 것은 그보다도 훨씬 뒤, 군에 입대하고 나서다. 1981년, 소위 일류대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방황 끝에 도피하듯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보니 은근히 재미도 있고 할 만하다. 훈련을 마치고 배출(학교로 치면 졸업)될 때 측정이라는 걸 받는데 측정 결과 내가 대대에서 3등이란다. 몸으로 부대끼는 일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작대기 세 개를 달고 나서는 특공연대에 차출됐다. 간첩영화에 가끔 나오는 모르쓰 부호, 돈 쓰 돈돈돈..... 무전을 치는 CW라는 주특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특공연대는 산악 침투를 하는 게릴라 부대다. 주된 훈련이 산악행군, 무거운 무전기를 메고 인가도 길도 없는 강원도 산골짜기를 며칠씩 산악행군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큰 녀석들이 나보다 더 힘들어한다는 사실, 알고 보니 나는 약골이 아니라 강골이었던 것이다.
그런 강골이 스페인에 와서 보름쯤 걷기만 했으니 뭐 날개를 다는 것은 당연한 일, 바람속을 바람처럼 걷는다.
오래된 마을을 지나고 오래된 다리를 건넌다. 강이 그림처럼 예쁘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강이 아닌 운하가 길을 따라 달린다. 폭이 4-5m쯤으로 과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다. 바람이 들판을 지나 억새를 흔들고 내 몸을 간질인다. 물을 건너는 바람의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여기가 프로미스타, 빨렌시아 지방의 시작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예약한 숙소를 찾았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내 배낭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 헉, 배낭이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알아보겠다며 어제 잔 숙소를 묻는다. 그리로 전화를 하는데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걸로 봐서는 잘 아는 눈치다. 한참을 스페인어로 통화한 끝에 들려주는데, 배낭을 동키로 보내지 않았단다. 할아버지가 깜빡했나 보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난감해하는 나에게 주인은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곳 택시를 불러서 갔다 오든가 그쪽 택시에게 배낭을 보내라, 요금은 30유로다. 그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니, 자동차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길은 꼭 두발로 걸어야 하는 줄로 알았다.
아내가 발바닥이 아프단다. 하긴 오늘 좀 무리를 하긴 했지, 그래도 난 멀쩡한데 뭘 그 정도를 갖고 그러냐 싶다. 샤워를 하고 침을 놓을까 꺼내는데 옆 침대의 프랑스 아줌마가 좀 도와주겠단다. 자기가 마사지를 좀 한단다.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반쯤은 예의상 그러라고 했는데, 결과는 뜻밖이다. 아내 말로는 발바닥을 문지를 때 시원함이 머리끝까지 올라온단다. 한참을 열심히 발을 문지르는데 옆에서 바라보는 내가 다 감동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고, 겨우 길에서 몇 번 눈인사 정도 나눈 외국인에게, 그것도 발을 저리 정성스럽게 주물러 주다니. 고마운 마음에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발 마사지 아줌마는 퇴역군인으로 스페인 국경 부근에서 살고 있단다. 짧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은 대화는 마치 퍼즐 맞추기처럼 어렵지만 재미있다. 한참을 떠들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문득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누나 같다. 누나야, 고마워
11월 4일
사달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오른쪽 발목이 아프다. 시큰시큰 통증에 걸어보니 안 되겠다. 아내와 상의했다. 어차피 발목도 탈이 난 데다가, 순례를 시작하고 꼬박 보름간을 쉬지 않고 걸었으니 하루쯤 쉬어가자, 게다가 숙소도 깔끔하고 도시도 예쁘장하니 딱 좋은 조건 아니냐. 아내도 동의했다.
보름 만에 처음으로 늦잠을 자고 빈 주방에서 아점을 준비해서 먹으려는데 대만 순례자 릴리가 들어온다. 길에서 몇 번 지나친, 아주 활기차고 씩씩한 대만 처녀다. 릴리도 나처럼 무리를 했는지, 오늘은 발이 아파서 못 걷고 차를 타고 일찍 왔단다. 밥도 넉넉하겠다, 함께 먹기를 청했더니 너무나 감동하는 눈치다. 하기야 대만이나 한국이나 식습관이 비슷할 테니 어쩌면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밥맛이겠지. 더구나 객지에서 아프고 서러운 데 뜻밖에 따뜻한 밥을 만났으니 기분이 어떨까 싶다. 굳이 설거지를 자청하고 배낭을 뒤져서는 아껴먹었음직한 매큼한 소스 하나를 선물로 준다. 마음이 고마워서 거절하지 못했다.
내친김에 침을 놔주겠다고 제안했다. 좋단다. 나름대로 정성껏 침을 놓았다.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젯밤 프랑스 아줌마의 발 마사지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저녁때가 되니 한국의 젊은이들 그룹이 들어왔다. 이들과는 주로 먹으면서 친해진 사이다. 셋째 날, 굶주린 끝에 비아바에서 간식을 나눠먹으며 마음을 열었고 벨로라도에서는 우리 부부가 돼지갈비를 사 주었다. 며칠 후에는 젊은이들이 답례로 저녁을 한차례 차려주기도 했다. 피를 나눈 사이 못지 않은 끈끈한 사이, 우리는 음식을 나눈 사이다.
시간도 많겠다, 아내가 한 요리 하겠다 뭐 저녁준비가 어려울 게 없다. 채소와 하몽을 곁들인 샐러드, 윤기 자르르 흐르는 자포니카 쌀로 지은 쌀 밥, 감자는 썰어서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후에 프라이팬에 볶고 훈제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서 양파와 채소, 양념을 넣고 둘둘 볶았다. 여기에 와인이 빠질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차려 놓고 대가족이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다. 역시 밥은 해 먹는 밥, 그 중에서도 여럿이 나눠 먹는 밥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