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 이름만으로도 부르르 떨린다. 이걸 여행기에서 뺄 수는 없나 고민도 된다. 그만큼 지우고 싶은 지명,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프런트에 아가씨 한 명이 근무 중이다. 올라, 인사를 하고 예약이 돼 있다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서류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바닥을 펴서 나를 제지한다.
“그만(stop), 나 서류 정리해야 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조금의 웃음기는 고사하고 친절함이나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태도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이건 뭐지? 마치 강아지나 노예에게 명령하듯 말하는 저 태도는 혹시 인종차별인가?
분을 삭이지 못해 현관을 나와서 식식거렸다. 그냥 딴 데로 갈까, 생각하니 40유로, 돈이 아깝다. 꾹 참고 다시 들어가서 방을 배정받았다. 그나마 방이라도 따뜻했으면 좋으련만 가구라고는 덜렁 침대만 놓여있고 냉기가 감돈다.
친절한 스페인 사람들이라고, 까미노를 내주었다고 잔뜩 칭찬을 했는데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다. 여행기에서 인종차별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바 있는데 어쩌면 부르고스가 아닌가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인종차별 얘기를 좀 더하면 나는 모두 세 차례 인종차별로 느껴지는 대접을 받았다. 모두 부르고스 주변이다. 한 번은 카페에서, 두 번은 숙소에서, 그런데 묘하게도 세 번 다 여자들에게 받았다. 그중에서 단연 이곳이 압권이다.
그게 인종 차별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불친절이었는지는 아직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며칠 후에 공립 알베르게에서 어느 스페인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됐다.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 충분히 칭찬을 한 후에 이곳에서의 일과 혹시 인종차별인지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 할아버지도 모르겠단다. 그저 자신도 까미노에서 굉장한 불친절을 경험했노라고 일화를 얘기해 줄 뿐이었다.
부르고스 성당, 크고 화려하다
마침 축제기간인지 가장행렬과 인파가 시내를 꽉 채웠다
부르고스에 대해 정이 뚝 떨어졌다. 화려한 성당이 바로 코앞인데도 들여다보기조차 싫다. 그나마 한국 단체 순례객들과 만나서 맛있는 요리에 와인 한잔, 그리고 무슨 축제기간인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북적거리는 광장과 시가지를 산책하면서 조금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어쨌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부르고스다.
부르고스 – 오르니오스 델 까미노, 11월 1일
뒤로 돌아보기 싫은 부르고스를 벗어나기 위해 부지런히 걷는다. 그래, 한국에도 별 사람 다 있겠지? 동남아에서 여행 온 사람에게 인종차별적 모욕을 주는 경우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어차피 차별이야 의식 수준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니 그건 차별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하는 사람의 문제 아니겠어? 별 이상한 논리까지 동원해가며 나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걷고 나서야 제대로 된 까미노를 만났다. 까미노가 나를 반겨준다.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예약한 숙소에 들어가니 한국 단체 순례자들과 그동안 헤어졌던 한국 젊은이들, 외국 순례자들이 다 모였다. 오랜만에 이산가족이 만난 듯,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 저녁식사는 단체 순례자를 이끌고 있는 여행사에서 준비한 특별 메뉴, 김치찌개다. 물론 식비를 따로 내기는 했지만 거의 대접받는 느낌이다.
오르니오스 –까스뜨로 헤리쯔. 11월 2일
앞서 말했지만 순례길은 주로 산과 들과 오래된 마을 사이로 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현대적인 도시와 공업단지를 지나기도 하고, 고속도로나 국도변을 따라 찻소리를 들으며 걷기도 한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만 해도 대부분이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길이었는데, 크게 봐서 부르고스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로변을 따라 걷거나 때로는 차가 달리는 도로를 횡단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이것도 순례의 과정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내 돈 내고 멀리까지 와서 차 소리를 들어가며 걸어야 하나, 중간중간 드는 회의감을 억누를 수가 없다.
숙소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허름한 공립 알베르게다. 원래는 한국의 단체 순례자들과 함께 묵기로 했는데, 도착해보니 갑자기 입장이 바뀌었다. 여행사 스탭이 담담한 어조로 다른 알베르게에 묵었으면 좋겠단다. 일행 중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했나 보다. 어쩌면 어제 나눠먹은 김치찌개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싶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배낭을 둘러메고 나왔다. 가까운 공립 알베르게를 찾았다. 할아버지 두 분이 운영하시는 듯, 작고 오래된 알베르게다.
숙소를 정하고는 슈퍼를 찾아 나섰다. 골목길을 내려가다 보니 웬 아저씨가 문 앞에 나와 있기에 슈퍼마켓을 물었다.
“올라, 돈데 에스따 수뻬르메르까도스?“
이 정도 스페인어는 이제 술술 나온다. 한국말로 하면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는 뜻인데, 문제는 딱 요기 까지라는 거다. 그다음에는 스페인어를 모르니 대답하는 사람의 손짓과 표정으로 대충 알아듣고 그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가 좀 있다. 슈퍼마켓이 멀고 방향도 복잡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적당히 포기하고 가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잠깐 기다리란다. 그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아내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뭐라 뭐라 하는데, 내가 이 사람을 슈퍼마켓에 차로 태워다 주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라, 뭐 이런 눈치다. 부부가 막 외출을 하려던 참인 것 같다. 결국 아저씨의 차를 타고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참으로 친절한 스페인 아저씨다. 나라면 과연 처음 보는 외국 친구를 차에 태워서 데려다주었을까, 자신이 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거듭 했지만 뭔가 셈을 덜 치른 듯 찜찜함이 남는다. 몇 년 후에라도,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는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이자가 붙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