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컨디션이 망가졌다. 나는 똥꼬가 간질간질 치질기가 보이면서 속이 메스껍고, 아내는 장이 꾸룩꾸룩 평화롭지가 않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리저리 원인을 짐작해 보지만 딱히 특정하기 어렵다. 아내의 배앓이야 호이안에서 달랏 오는 도중 터미널에서 마신 물 탓이라고 치고, 도대체 나는 왜 속이 메스꺼운 걸까? 진하면서 시원한 쌀국수를 너무 욕심내어 먹어서일까, 아니면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원인이야 어찌 됐든 오늘은 하루쯤 쉬기로 한다.
이번 여행을 나서면서 몇 가지 비상약들을 챙겨 왔다. 코로나를 대비한 해열 진통제와 효과 좋은 한방소화제,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정로환 등등. 해열진통제와 정로환은 대전에 사는 약사 친구가 베트남 여행에 협찬을 했는데 이 친구의 호의가 진가를 발휘할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비상약에 더해서 특별한 대비수단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한방 침 동호회에서 침과 뜸을 배워서 평소에도 서로에게 시술을 해주는 사이다 보니 침 여러 쌈과 뜸을 준비해 온 것이다. 동호회 리더인 침 선생님에게 카톡으로 자문을 받아보니 아내의 속탈은 위장경으로 다스리고, 나의 치질은 기운이 떨어져서 생긴 하수증이니 백회에 뜸을 해서 기운을 잡아 올리란다. 그리고 냉한 음식을 삼가야 하니 가능하면 국수와 찬 음식을 피하란다. 쌀국수는 괜찮지 않냐고 물어보니 쌀도 가루로 만들면 성질이 냉해진단다. 더운 베트남 사람들이 밥보다는 국수를 주식으로 하던데, 그게 더위를 이기기 위한 지혜로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갑자기 달랏의 호텔방이 한방병원 입원실로 변했다. 정로환과 한방소화제를 먹고 뜸, 침에 마사지까지....., 우리 부부가 알고 있는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해서 몸 추스르기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족욕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장이 불안하고 기운이 아래로 쳐졌다면 발을 따뜻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문제는 족욕기가 없다는 것, 호텔 직원에게 부탁하여 큼직한 양동이를 빌렸다. 뜨거운 물을 받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온도를 맞추며 둘이 마주 앉아 족욕까지 한다. 30분쯤 지나자 온몸이 훈훈해지며 등과 얼굴에 은근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속이 따뜻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일까? 돈, 시간, 건강, 마음의 여유, 좋은 여행 파트너, 날씨, 내 취향에 맞는 여행지......, 모두들 필수적인 조건들이겠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이 나이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학생시절에는 여행을 가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돈만 있으면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목포도 제주도도 설악산도 가고 싶은데, 문제는 돈이 없었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이번에는 시간이 없었다. 돈이야 그럭저럭 해 볼만한데, 일 년에 고작 일주일 정도의 휴가로는 여행의 갈증을 채우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은퇴하고 보니 조건들이 보다 더 복잡해졌다. 우선 시간은 무한정 많으니 걱정 없고, 돈은 잘하면 일 년에 한 번 동남아 정도는 올 것도 같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앞의 조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변수가 등장했으니 그게 바로 건강이다. 아직은 여행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는 나이지만 조금씩 체력을 아끼면서 여행일정을 조절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도 천천히, 너무 무리하지 않고 먹어야 하고 깨끗한 숙소에서 잠도 충분히 자 줘야 한다. 너무 욕심내어 돌아다니는 것도 피해야 한다. 은퇴자들이 여유롭게 여행하는 걸 보면 부러워했더니만, 막상 내가 해 보니 미처 몰랐던 약점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이틀간 몸을 추스르며 뒹굴거리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한국식당엘 가잔다. 한국식당에 가자는 것이 왜 뜻밖이냐고 의아하겠지만 우리 부부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외국에서 한국식당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편이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이라는데 음식도 마찬가지, 현지에서는 현지식을 먹자는 게 내 주장이다. 어차피 한식이야 돌아가면 실컷 먹을 텐데 뭣하러 찾아가서 비싼 돈 내고 한식을 먹느냐는 거다.
그러나 그건 젊었을 때 얘기고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육십 나이에 남편과 함께 동남아로 헝그리 여행을 나서 준 아내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올려서도 안 될 말이다. 바로 검색을 해보니 북촌식당이 눈에 띈다. 오토바이로 쌩하니 달려 도착했다. 넓은 홀에 좌석이 100여 개는 넘을 듯한데, 막상 손님은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두 팀이 전부다. 시간을 보니 오후 두 시가 넘었으니 이해는 간다. 김치전골을 시켰다. 가격은 33만 동, 한국돈으로 치자면 18,000원 정도니 그저 한국에서 먹는 값과 비슷하다. 물론 베트남 물가로는 조금 비싼 정도다. 그런데 나온 양이 만만치 않다. 김치를 푸짐히 깔고 돼지고기와 두부, 파를 듬성듬성 얹었는데 보자마자 입에 침이 스르륵 고인다. 아내는 벌써부터 행복한 표정이다. 한 숟가락 퍼 먹는 순간, 어어 시원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심심하면서 시원한 김치 국물을 부지런히 퍼다가 입에 넣는다. 분명히 뜨거운 찌개인데,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은 시원하게 느껴지니 참 이상한 일이다. 부지런히 김치찌개를 퍼 넣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여보, 거 할아버지처럼 어어- 거리는 소리 좀 내지 마, 창피해"
할아버지들이 사우나에서 내는 감탄사를 나도 모르게 냈구나, 다시 한 숟가락 퍼 넣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그 감탄사가 일부러 내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국물, 그중에서도 딱 심심한 김치찌개 국물을 퍼 먹을 때만 자동으로 나는 소리였나 보다. 조심조심 소리를 죽여 퍼먹으며 생각해 본다. 아니 김치찌개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갑자기 정광태의 노래가 떠오른다. 2/2박자의 빠르고 단순한 리듬에, 듣다 보면 어깨가 들썩들썩 어느새 따라 부르게 되는 '김치 주제가' 말이다.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진수성찬 산해진미 날 유혹해도
김치 없으면 왠지 허전해
김치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
나는 나는 너를 못 잊어
맛으로 보나 향기로 보나
빠질 수 없지 입맛을 바꿀 수 있나
현지에서는 현지식이라고 떠들어대던 과거는 까맣게 잊고, 노래의 율동에 따라 몸까지 까딱거리며 김치찌에 푹 빠진 내 모습이 재미있다. 북촌식당의 김치찌개 덕분에 우리 부부는 컨디션의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후기>
이후 나는 몇 군데 도시에서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대략적인 가격과 느낌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오록 Korean BBQ, 김치찌개. 최악임. 너무 달고 느끼해서 먹지 못함. 밥도 안주는 곳
2. 사이공 최고집, 김치찌개 16만 동. 평범한 느낌.
3. 사이공 명가, 순두부찌개 25만 동(서비스료 별도). 값은 비싼데 평생 먹어 본 최고의 순두부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