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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랏, 라이더로 살아볼까?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9

by 심웅섭

13시간의 대 장정 끝에 달랏에 도착했다. 아침 6시 30분, 우리나라라면 아직 깜깜한 한밤중인 시간인데, 벌써 찬란한 아침 햇살이 퍼지는 중이다. 밤새 버스에서 구겨진 몸을 주섬주섬 추슬러 터미널을 나서니 택시 기사들이 달려들어 호객을 한다. 심심풀이로 얼마냐고 물으니 10만 동을 부르는 친구도 있고 깎아서 7만 동이라고 파고드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베트남 체류 일주일째인 우리 부부는 노련하게 그랩을 켜고 차를 예약한다. 45,000 동, 한국 돈으로 치면 2,500원이다. 달랏의 도로는 쭉 뻗은 직선도로보다는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많다. 평지가 아니라 굴곡이 있는 고원지형이기 때문이다.


10분 만에 숙소에 도착, 이른 체크인을 한다. 언덕 위의 숙소인 데다가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돼 있어서 기분이 좋다. 동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에는 아침 햇살이 화사하게 비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창 밖을 내다보니 도시전체가 언덕과 저지대로 올망졸망 이루어져 입체적인 데다가 언덕에 서 있는 집들이 모두들 밝고 예쁘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사람들의 휴양지로 개발되어서 '작은 파리'로 불린다더니, 과연 유럽의 어느 도시 같은 느낌이다. 숙소 밑으로는 움푹 파인 저지대에 옹기종기 집들과 그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마을 길들이 정겹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무리해서는 안된다. 자칫 컨디션이라도 흐트러지면 여행 중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느새 나이가 6학년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체력을 아껴줘야 한다. 샤워를 끝내고 암막 커튼을 치고 잠을 청한다. 슬리핑 버스에서 조금이라도 쌓인 피로가 있다면 다 털어 버릴 참이다.


제법 긴 시간을 잤나 보다. 눈을 떠 보니 11시가 다 됐다. 프런트에 내려가서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했다. 체크인할 때 오토바이를 쓸 거냐고 묻길래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달랏에서는 오토바이를 써야 할 모양이다. 우선 호이안보다 도시가 크고 언덕이 많다. 골목길은 평지의 도시처럼 격자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구불구불한 큰 자동차길을 중심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을 뿐이다. 골목길로 걸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움직일 때마다 그랩택시를 불러 탈 수도 없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오토바이 빌리는 값은 비싸지 않다. 인터넷에서는 대충 하루 2만 원 선이라더니, 프런트 직원은 하루 15만 동, 한국돈으로 치면 8,300원을 요구한다. 거기에 기름값이 포함이라니 거의 거저 빌려주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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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맵을 켜고, 클러치 없는 50cc짜리 오토바이를 타고 아내와 길을 나섰다. 내 담당이던 가죽배낭을 아내가 메고, 선글라스에 헬멧을 쓴 모습이 재미있다. 아내가 내 재킷의 모자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니 내비게이션 소리가 아주 또렷이 잘 들리니 제격이다. 그런데 숙소를 나선 지 불과 100m도 채 되지 않아서 어디선가 호텔 직원이 뒤에서 나타나서 나를 세운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정차, 이 길로 가면 경사가 급해서 위험하니 찻길로 가란다. 사실은 호텔을 나설 때부터 직원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가 못 알아 들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짧은 영어 탓도 있지만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서였다. 우선 내게 GG맵을 사용하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물어도 계속 다른 설명만 하기에 혹시 베트남에서만 쓰는 앱인 줄 알았다. 우리나라의 카카오 맵처럼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GOOGLE 맵을 말하는 거였다. 다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맵에서 OTO로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이것 역시 우리는 쓰지 않는 단어인데 자동차라는 뜻의, Auto를 말한 거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구글 맵을 켜고 길을 찾되 오토바이 길이 아니라 자동차로 설정하라는 뜻이다. 호텔 직원이 보기에 내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한 것 같으니 못 미더운 마음에 곧장 따라온 것이다.


수많은 오토바이의 물결 속에서 나도 물방울 하나가 된다. 소싯적에 50cc부터 250cc까지, 제법 탄 경험이 있고 2종 소형 면허도 가지고 있지만, 오랜만에 타 보니 낯설다. 운전이 문제가 아니라 현지의 교통 흐름에 적응하는 게 만만치 않다. 특히 회전형 교차로가 어렵다. 우선 구글맵이 네 번째 출구니 다섯 번째 출구니 이상한 용어를 쓰는 통에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 헛갈린다. 무엇보다도 차와 오토바이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들어가면서 뒤섞이는 교통 체계라서 어지간한 배짱과 감각이 있지 않고서는 멈칫멈칫 서거나 다른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십상이다. 특히 어려운 것은 정체구간에서 앞 차를 따라 극서행을 하는 일이다. 너무 느리면 오토바이가 넘어질까 봐 발을 땅에 닿게 되는데 발을 내리기 시작하면 핸들 균형이 무너지게 되어 비틀비틀 불안한 운전이 되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런 외국인들이 교통 흐름에 방해되는 그야말로 진상 라이더들이겠구나 싶다. 몇 시간 타다 보니 조금씩 감이 온다. 제법 현지인들처럼 흐름을 타거나 추월도 하고, 누군가가 걸리적거리면 빵빵거리기도 한다. '이 정도면 달랏에서 오토바이 그랩기사를 해도 되겠는 걸', 뒤에 앉은 아내가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르게 한마디 할 정도다.


이제 커피를 한 잔 마셔볼 참이다. 달랏은 베트남에서 유명한 커피 산지다. 보통 커피는 에티오피아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후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중남미와 하와이 까지 전 세계로 그 재배지가 늘어났다. 그런데 커피 재배가 아무 데서나 되는 것은 아니다.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와 비슷한 환경, 그러니까 위도는 낮고 고도는 해발 1500m 이상인 지역에서만 질 좋은 커피, 그중에서도 향이 좋은 아라비카 종이 재배된다. 연간 강수량과 기온이 맞아야만 되는데 이게 바로 위도가 낮고 고도가 높은 곳들이다. 고도가 더 낮은 지방,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되는 데 이건 로부스타 종이라고 해서 향이 아라비카에 비해 떨어지고 값도 30% 이상 저렴하다. 로부스타는 주로 인스턴트용 가공커피 원료로 사용하거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로 추출해서 물을 타거나(아메리카노) 달달한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은 커피음료로 활용된다. 핸드드립에는 아라비카 종만 사용된다. 그런데 이곳 달랏은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아라비카 종이 재배되는 곳이다. 평소에 집에서 허름한 깡통으로 로스팅을 직접 하고 매일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당연히 커피에도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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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미리 검색을 했단다. 핸드드립으로 유명하다는 라 비엣 (La Viet) 커피숍을 찾았다. 도착해 보니 굉장히 큰 창고의 한쪽을 커피숍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러 대의 기계를 놓고 로스팅을 하고 있어서 그 열기가 후끈하다. 반대쪽 창고에서는 넓은 홀(창고 바닥)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컴퓨터를 만지기도 한다. 무슨 원두가 있나 보려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세 가지가 쓰여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커피 이름은 보통 원산지의 이름을 그대로 쓴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라고 하면 바로 에티오피아의 예가체프 지방에서 나오는 커피를 말한다. 여기에 내추럴이니 워시드 같은 가공 방식에 따라서 수식어가 첨가되고, 맛에 따라 허니가 붙거나 디카페인, 피베리 등의 단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 커피이름에는 CAFEC, KALITA, PHIN DRIP의 세 가지만 있다. 용어로 봐서는 커피 종류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드립 방법에 따른 분류인 듯싶다. 일단 맛을 잘 모르겠어서 앞의 두 가지를 시켰다. 잠시 후에 작은 주스병처럼 생긴 커피와 빈 잔을 가지고 왔다. 카페 내부를 찍는답시고 드립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색깔이 연하고 온도가 따듯한 정도이니 맛도 연하고 부드럽겠다. 마셔보니 역시 연하고 향기롭다. 보통 커피숍에서 혼합커피를 먹거나 쓴 아메리카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정도의, 고소하고 새큼하고 약간의 향기도 감도는 게 마치 커피 주스(^^)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로스팅을 미디엄에서 하이 정도로 약하게 하고 물의 온도도 85도 정도로 연하게 드립 한 듯싶다. 괜찮은 맛, 그러나 2%의 아쉬움은 남는다. 맛이 깊고 조화로운 게 아니라 얕고 단순하다는 거다. (물론 이런 지적은 순전히 나의 취향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정도의 맛을 내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좋은 생두를 강하지 않게 로스팅해서 너무 뜨겁지 않은 물로 살짝만 드립 하면 된다. 아깝다고 너무 오래 내리면 쓴 맛과 떫은맛이 내려온다. 마른 서버에 그냥 내리지 않고 뜨거운 물을 적당히 미리 서버에 부어 놓고 드립 하는 것도 요령이다. 어차피 드립 해서 물을 섞는 거나, 미리 물을 깔고 드립하나 물리적으로 보면 똑같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셔보면 다르다. 후자의 방법이 훨씬 더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물론 이것도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다. 어쨌거나 라 비엣의 핸드드립 커피가 훌륭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다는 게 아마추어 커피 마니아인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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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랏에서의 첫날 일정은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아무렴 힘든 관광일정을 소화해야 할 단기 관광객도 아니고 적당히 체력을 아껴야 할 장기여행자이고 보니 여행에서도 절제가 필요하다. 다시 헬멧을 꺼내 쓰고 오토바이에 오른다. 숙소까지는 10분. 그러나 길을 잃을까, 다른 오토바이와 부딪힐까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다. 게다가 살짝 차가워진 공기에 매큼한 매연을 코에 달고서 말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도시 달랏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게 현실이구나 싶다. 뚜벅이가 체질인 우리 부부가 라이더로 변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순간 작은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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