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8
12월 20일, 호이안에서의 5박 6일 여행을 아쉽게 접는다. 며칠 더 머물거나, 아예 한 달간 야금야금 즐길 수도 있을 만큼 호이안은 마음에 드는 도시이다. 문제는 날씨다. 이곳의 기후로는 겨울철이 우기란다. 실제로 처음 호이안에 도착한 이틀을 빼고는 계속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가 계속된다. 아무리 경치가 좋고 평화로와도 계속되는 흐린 날씨를 버티기는 어려우니 마침 건기라고 하는 베트남 남부, 고원도시 달랏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홈스테이 주인을 통해서 슬리핑 버스를 500,000동에 예약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원래 버스비는 340,000동이고 나머지는 표를 판매하는 호텔 측과 터미널까지 픽업해 주는 차비로 쓰인다고 한다. 3시 30분에 픽업 차가 온다더니 시간이 되자 주인이 직접 태워다 준단다.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서 10분쯤의 거리에 있는 한적한 골목길에 세워 준다. 여기서 기다리면 버스가 온단다. 마침 먼저 온 서양 여자 둘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기에 궁금하던 걸 물어봤다.
"미안하지만 너 티켓 가지고 있니?"
그렇단다. 좀 보여줄 수 있냐고 물으니 종이에 볼펜으로 쓴 티켓을 보여준다. 이걸 누구에게 받았냐고 물으니 호텔 주인에게 받았단다. 우리 부부는 티켓은커녕 영수증 한 장 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이거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설마 푼돈에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앉아 있다 보니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아까 서양 여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티켓을 내민다. 그제야 불안감이 사라진다. 서양 여자들이 웃는 얼굴로 내 표정 변화를 살피는 걸 보니, 표 한 장에 감정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나 보다.
"티켓 받으니 행복하네, 아무래도 달랏은 걸어가기엔 좀 멀잖아?"
괜히 멋쩍어서 서툰 영어로 말하니 맞다고 깔깔깔.
아무리 봐도 9인승으로 보이는데 통로에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놓고 구겨 넣어서 결국 13명을 태운 미니버스는, 호이안의 골목골목을 한참이나 달린 끝에 낯선 도시에 손님들을 토해놓았다. 우리 부부와 베트남 아줌마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양 젊은이들이다. 좁은 버스에 끼어 앉아서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 거리더니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배낭을 던져놓고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서 수다들을 떤다. 우리 같았으면 대학 들어가고 취직 준비하느라 여행은 꿈도 못 꾸었을 젊은 나이에 저렇게 배낭 메고 여행을 하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득 궁금하여 직원에게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충전이 되는지 물어보았다. 15시간이 걸리는 슬리핑 버스이니 당연히 충전은 되겠지 하는 마음에, 배터리가 절반 밖에 남아있지 않은 스마트폰을 걱정도 없이 들고 나선 참이다. 그런데 충전이 안된단다. 어허, 큰일이다. 직원에게 충전기와 스마트폰을 들고 다가가서 이곳에서라도 충전 좀 할 수 있냐고 물으니 대답도 하기 전부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대뜸 나에게 '너 빠깐쓰를 아니?'라고 물어온다.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다. '아니,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는 순간, 잔뜩 실망한 듯 웃음기가 사라진다. 아차, 이건 뭔가 문맥으로 이해해야 할 상황이로구나. 생판 모르는 나에게 반갑게 물어봤다는 것은 한국인임을 눈치채고 뭔가를 한국말로 물어봤겠구나, 하는 순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오, 박 항 서. 알아, 당연히 알지"
한국에 히딩크가 있었다면 베트남에는 그보다 더 핫한 국민영웅 박항서가 있다. 묘한 경음 발음에 못 알아 들었을 뿐이다. 내 말을 듣는 순간 직원의 얼굴에 처음보다 더 커다란 웃음기가 가득 퍼진다.
"그럼 너 손흥민도 알아?"
"그럼, 손흥민도 알지. 이번 월드컵에서도 뛰었잖아"
이번에는 이름을 즉시 알아 들었다.
"그럼 너 유재석도 알아?"
"그럼, 유재석도 알지.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아?"
"나 유재석 팬이야, 너도 팬이야?"
"그럼, 나도 왕 팬이지"
사실 나는 유재석의 왕 팬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선택한 경우는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분위기에서는 그의 왕 팬이 아닐 수 없다. 직원은 웃으면서 일어나서 전기 콘센트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보조의자까지 갖다 준다. 여기서 앉아서 편하게 충전하라는 배려다. 얼굴도 모르는 박항서와 손흥민, 유재석 때문에 갑자기 특별대접을 받는다. 주변에는 서양 젊은이들이 득실득실하건만 지금 이곳에서 대한민국을 당할 나라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간 가슴이 뿌듯, 어깨가 으쓱해진다. 오호라, 대한민국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인정을 받는다더니 과연 사실이로구나, 앞으로 서양 친구들에게 괜히 기죽을 이유가 전혀 없구나.
오후 5시 30분, 한 시간 여를 기다린 끝에 달랏행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 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단다. 버스는 이층, 3열로 좌석이 돼 있다. 세어보니 각 층에 스무 개씩 모두 40명이 타는 구조다. 그리 넓거나 안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발을 쭉 펴고 누워서 자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비행기로 유럽이나 미국을 갈 때는 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꼬박 12시간을 견디기도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건 호사에 가깝다. 문제는 내 좌석이 버스의 뒤쪽, 엔진 부근이라는 거다. 흔들림도 제법 있는 데다가 그르릉거리는 엔진 소음이 귀에 거슬린다. 얼른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꺼내 클래식 채널을 켜니 그나마 좀 낫다. 스마트 폰 배터리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까짓 거 꺼지면 달랏에서 어찌어찌해 볼 참이다. 아내는 내 앞자리에 앉아서 넷플릭스 영화로 장거리 탑승에 대비하고 있다.
그런데 순간 머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다. 버스 안에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 인터넷 검색에서 후기들을 보니 모두들 화장실이 있다는 글 뿐이었다. 더구나 15시간 장거리 버스이니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없다. 버스 출발 전에 한 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걸로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버스가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허름한 정류장에 정차했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고 내리란다. 냉큼 내려보니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가란다. 남자들을 따라가 보니 정류장 옆 길가에서 모두들 노상방뇨를 한다. 익숙한 상황이다. 20여 년 전 상해 출장에서의 경험이 생각났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상해 시내로 들어가다가 화장실이 급했다. 기사에게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세우라고 하니 약간 한적한 도시공원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저 쪽에서 일을 보란다. 머뭇거리는데 다른 아저씨 한 명이 나를 앞지르더니 나무밑에서 노상방뇨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었다. 한적하다고는 해도 도시공원이고 머리 위로는 고가도로도 지나가는 데 대낮에 노상방뇨라니. 그러나 당황도 잠시, 현지 적응력이 강한 나는 에라 모르겠다 볼 일을 보았고 두고두고 무용담으로 삼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지 식으로 임무 완수.
이후로도 버스는 두세 차례 휴게소에 들르거나 노상방뇨의 기회를 주어서 화장실 문제는 큰 무리 없이 넘어갔고, 버스를 타기 전에 낯선 동네를 헤맨 덕에 밤 10시가 넘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서 그런대로 편안하게(^^) 달랏까지 버스 이동을 완수했다. 시간을 보니 아침 6시 30분, 꼬박 13시간 대 장정을 이겨낸 것이다.
이로써 내 이력서에 경력 하나가 추가됐다. 혹시라도 누가 버스 오래 탄 얘기라도 꺼내면 한 칼에 잠재울 화려한 경력 말이다. 기껏해야 대여섯 시간으로 힘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해 줘야겠다.
"저, 버스 몇 시간이나 타 보셨어요? 저는 꼬박 13시간을 타 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