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실컷 게으름, 아니 행복을 맛보다가 10시가 넘어서야 이불 밖으로 나왔다. 아침은 해장국 대신 과일로 때울 참이다. 어제 사놓은 두리안에 망고스틴, 패션프루트에 망고까지 남아있으니 과일 식사치고는 꽤나 호사스러운 상차림이다. 여기에 달달한 베트남 믹스커피인 G7에 재스민 차까지 차려 놓으니 부족할 것이 없다. 침실 앞 발코니에 테이블을 세팅하고 폼을 잡아가며 과일식사를 즐긴다.
앞서 망고맛에 대해 자랑을 했지만 사실 망고 외에도 맛있고 재미있는 과일들이 많다. 베트남에 온 지 일주일이 되어 이제 슬슬 알아가기 시작한 열대과일들을 한 번 소개해본다. 먼저 과일의 여왕이라 불리는 두리안, 커다랗고 울퉁불퉁 못생긴 과일이 마치 부풀어 오른 도깨비방망이를 닮았다. 큰 녀석은 10KG이 넘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큰 과일이다. 이 과일의 특징은 큰 것만은 아니다. 묘하게 콤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하고 꿈을 꾸는 듯한, 전혀 과일스럽지 않은 비현실적인 맛이 가장 큰 특징이다. 냄새는 약간 썩은 냄새와 비슷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냄새 때문에 웬만한 호텔에서는 두리안 반입을 금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한 번 맛을 들이면 계속 찾게 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식감도 전혀 과일스럽지가 않다. 마치 뇌처럼 생긴 노르스름한 과육을 입에 넣으면 물컹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KG당 현지가격이 11만 동, 예를 들어서 10KG을 사면 110만 동(6만 원쯤)인데 이걸 까면 먹을 수 있는 과육은 불과 얼마 나오지 않는다. 과육 안에 밤톨 만한 크기의 씨앗이 있어서 실제 목으로 넘어가는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부부가 한꺼번에 먹을 양으로 100만 동쯤 줘야 주먹 보다 좀 큰 두리안 과육이 네 조각 정도니 현지인에게는 물론이고 여행자에게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며칠에 한번 먹는 걸로 절제해야 할 과일이다.
두리안이 비싸고 부담스러우면 대체품으로 잭프룻을 권한다. 잭 프룻은 두리안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시가 더 작고 과일은 더 크다. 이걸 열면 씨앗을 품은 작은 과육들이 수도 없이 줄지어 있는데 이걸 적당한 양으로 소분해서 팔고 있다. 맛은 약간의 두리안 냄새에 달착지근하고 아삭한 식감이 좋다. 더구나 수확시기가 두리안은 여름인데 비해 잭 프룻은 겨울이니 말하자면 제철과일이다. 가격은 KG당 2만 동쯤.
두리안을 제하고 제법 비싼 과일이 망고스틴이다. 검붉은 색깔의 두꺼운 껍질을 까면 마치 마늘을 닮은 하얀 과육이 6-7개쯤 들어앉았는데 먹어보면 달콤한 맛에 새콤한 맛이 아주 약간 따라온다. 가격은 KG당 20만 동. 이외에 파파야, 용과, 용안, 오렌지, 바나나 등이 있지만 내게 가장 임팩트 강한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패션 프루트다. 자줏빛의 반들반들한 녀석인데 이걸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이 필요하다. 칼로 조심스럽게 반을 갈라 보면 씨와 연초록색의 묽은 과육이 대충 섞인 듯, 마치 성게알처럼 찰랑찰랑 들어있다.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으면 순간, 입 안에서 강한 신 맛이 팍 터지고 이어서 단맛과 향기로운 냄새가 뒤를 따른다. 가격도 3만 동으로 저렴한 데다가 평소에도 신맛을 워낙 즐기다 보니 나의 최애 과일로 등극했다. 게다가 아내가 신맛을 싫어해서 나눠먹을 일도 없는, 안전한 나만의 즐거움이 바로 패션프루트다.
과일로 거하게 (돈으로 치면 100만 동이 넘는, 베트남에서는 후덜덜한 가격이다) 아침을 대신하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5KM 정도 떨어진 안방비치를 걸어서 가 볼 생각이다. 혹시나 비가 올까 비옷을 가방에 챙겨 넣고 스마트폰에 구글맵을 켜고 길을 나섰다. 수많은 노점상과 오토바이와 소음들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 되었다.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이다. 큰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구글맵이 이번에는 동네 한가운데의 주택가로 안내한다. 이런 길까지 알고 있다니, 새삼 구글이 신기하고도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베트남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을 속살까지 들여다보니 나쁘지는 않다.
20여분을 걸으니 갑자기 시야가 확 터진다. 주택가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 넓은 논들이 허허벌판을 이루고 있다. 어디선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돌려보니 수많은 오리들이 물이 그득한 논에서 정신없이 헤엄치며 자맥질을 해댄다. 혹시 내가 녀석들을 쫒는 건 아닐까,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도 카메라를 들이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로 봐서 야생오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르는 녀석들이다. 논 둑에는 여기저기 물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거무티티한 색깔에 휘어진 뿔을 매단 녀석들이 낯선 이방인을 멀뚱멀뚱 구경한다. 하기야 관광객들이 지나다닐 길도 아니니 한국사람을 처음 볼 수도 있겠구나, 너는 나를 구경하고 나는 너를 구경하자. 카메라를 꺼내도 여전히 멀뚱 멀뚱이다. 농가 옆을 지나는데 송아지 두 마리가 또 우리를 구경한다. 가까이 가도 도망은커녕 먼저 코를 들이대며 관심을 보인다. 잠시 코에 손을 대고 우리는 서로를 확인한다. 송아지는 내 손 냄새를 맡는 것으로, 나는 손으로 촉촉한 코의 감촉을 느끼는 것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어미소도 안심했는지 멈추었던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벼를 모두 수확했는지 논은 텅 비어있고 물만 그득하다. 수로의 풀과 나무에 빨간 무언가가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무슨 열매인가 싶어서 가까이 가 보니 우렁이 알이다. 우렁이 껍데기가 나 뒹구는 걸로 봐서 수로와 논에 우렁이가 많다는 뜻이고 다시 말하자면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쓴다는 얘기다.
넓어진 수로 옆에서 낚시꾼들을 만났다. 짧은 낚싯대에 허름한 찌를 매달고 미끼로는 지렁이를 매달았다. 이런 흙탕물에서 뭐가 잡히나 싶은 순간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온다. 꺽지처럼 비늘이 날카로운 녀석이 잔뜩 화가 나서 가시를 세운 채 매달려 나온다. 낚시군이 망태를 물에서 들어 올려 자랑을 하는데 보니 이 녀석과 비슷한 가시 물고기와 붕어를 닮은 고기들이 반반씩 섞여있다. 낚시군들은 갑자기 나타난 여행자를 수줍음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대한다. 눈길만으로도 그들의 순박한 마음이 느껴진다.
다리를 건너 해변 마을로 들어선다. 한창 기계소리를 내며 도로 공사를 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도로 옆에 하수도를 묻는 중이다. 우리처럼 레미콘에 펌프카를 쓰는 게 아니라 작은 교반기에 시멘트와 모래를 비벼서 몰탈을 만들고 작은 수레에 이 몰탈을 받아서 일일이 붓는,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방식이다.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여행자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다. 현지인의 평범한 일상을 피부로 느끼며 즐기기, 바로 이점이 여행자가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관광객과 여행자는 결이 다르다. 관광객은 짧은 시간에 돈을 들여 멋진 풍광과 유적, 그리고 액티비티를 체험하고 돌아간다. 보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유명한 곳을 빼놓지 않고 구경해야 하고 먹어봐야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여행기간 내내 책과 인터넷을 통해 폭풍검색도 해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진도 남겨야 하니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구경도 잠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반면 나처럼 시간 많은 여행자는 유적지나 관광지가 아닌 삶의 현장, 뒷골목과 시장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소소한 삶의 현장에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현지인의 삶의 지혜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과 최대한 교감하고 그들의 삶과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존중한다. 내가 낯선 나라에 가면 서툰 영어보다는 가능하면 현지어로 대화를 시도하고, 현지인이 찾는 식당을 찾아 그들의 방식으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이런 과정들이 쌓이다 보면 뜻밖의 경험이 내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알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나의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익숙한 환경에 맞추어 나를 만들며 살았는데, 그 환경을 떠나 완전히 낯선 곳에 내려놓음으로 인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낯선 환경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일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하나 더 있다. 익숙한 환경 속에서 살던 과거의 나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활기찬 일상들을 보면서, 문득 내가 그동안 너무 게을렀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행은 삶에 휴식과 치유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유명한 관광지를 알차게 둘러보는 관광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상황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관광은 재미있고 여행은 행복하다.
안방비치에 도착했다. 다낭의 미케비치에서 이미 짐작은 했지만 바닷가로서 이곳의 풍광은 한마디로 그저 그렇다. 모래사장이라고 해야 폭이 10m가 채 되지 않는 데다가 경사도 제법 급하다. 더 황당한 것은 물 색깔이다. 우리가 본 동해바다의 짙푸른 색이 아니라 서해에서 보는 약간 황토색의 바다다. 아내가 한 마디
"헐, 이거 파도는 동해인데 물은 서해네"
다리 쉼도 할 겸, 잠시 상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본다. 베트남이라고는 해도 겨울인 데다가 날씨도 흐려서 선선한 편인데, 인도에서 온 듯한 여자 둘이 수영복을 입고 물에서 있다. 본전 생각이 나서 들어가긴 했지만 추우니 선뜻 수영은 못하고 있나 보다. 멀리 흐린 안갯속에 높은 건물들이 보이는데 마치 지구종말을 그린 공상과학영화에서 보았을 법한 괴기스러움이 느껴진다. 아내의 말로는 그곳이 바로 다낭이란다. 그 유명한 해수관음상이 쌀알만 하게 보이는 걸로 봐서 다낭이 맞다. 흠, 생각보다 멀지 않았군 싶다.
돌아오는 길까지 걷는 것은 좀 재미가 없을듯하여 오랜만에 그랩을 이용했다. 안방비치에서 구시가지까지 73,000동, 4,000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니 부담스럽지는 않다. 늦은 점심을 맛나게 먹고 커피는 숙소의 발코니에서 마신다. 오늘 일과의 일부가 끝났다. 이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어두워지면 다시 티본강에나 나가 볼 참이다.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 등을 단 배들을 바라보고, 야시장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산책하는 것, 밤 나들이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여행의 즐거움을 두 배로 즐기기, 이점이 바로 호이안의 가장 큰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