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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물가가 자꾸 내려가네?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기 4

by 심웅섭

아침 8시, 오늘은 호이안의 구시가지를 벗어나서 교외로 나가 볼 참이다. 호텔에서 무료로 빌려 주는 자전거가 있으니 그걸 타고 나가기로 했다. 호이안에서 이동하는 방법은 그랩, 택시, 오토바이 대여 그리고 자전거 정도가 있다. 자전거는 숙소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경우가 많고 오토바이의 경우 연료비를 포함하여 하루 15만 동, 약 8,500원이면 숙소에서 대여가 가능하다. 물론 호텔에 이런저런 투어를 신청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밥도 주지만, 주머니 얇고 시간 많은 백수에겐 꼭 필요한 선택은 아니다. 더구나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란 뜻밖의 서프라이즈들이 추억에 남는 법, 비싼 돈 내고 기성품을 살 이유는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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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자전거를 타고 호텔을 나섰다. 대충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 보니 허름한 현지식당이 눈에 띈다. 가게 앞 가판대를 겸한 조리대에서 주인아줌마가 고기를 썰어대는데 딱 우리나라 장터 순댓집 풍경이다. 들어가 보니 메뉴는 딱 한 가지 퍼, 고기국수다. 하얀 쌀국수 삶은 것에 육수를 붓고 돼지고기로 보이는 고기를 부위별로 듬성듬성 썰어서 푸짐하게 얹은 다음 채소를 먹음직스럽게 얹어준다. 잠시 후 순댓국 닮은 쌀국수가 나왔다. 여기에 고추를 빻은 듯한 양념과 후추를 살짝 뿌려서 한 숟가락 떠 본다. 음, 생각보다 국물맛이 깊으면서도 깔끔하다. 심심하면서도 진하고, 새콤하면서 매콤한 맛이 일품이다. 비주얼로 봐서는 돼지냄새가 날 법도 한데, 이름 모를 채소가 냄새를 잡아 준 건지 아니면 다른 비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허허, 이거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우연히 들른 허름한 현지식당이 맛집이었구나. 더 놀라운 건 가격이다. 다 먹고 나서 얼마냐고 물으니 6만 동, 한국돈으로 치면 3,000이 조금 넘는 액수다. 일인당 1,600원에 맛있는 고기국수를 먹었다는 말이다. 다낭에서는 120,000동 까지 주고 먹었는데 일인당 3만 동이면 1/4로 떨어진 것이다. 놀랍고도 고마운 가격, 이거 백수에게 딱 맞는 나라로구나.



아침을 먹고 나오니 바로 앞이 재래시장이다. 구경이나 할까 들어가 보니 아주 작은 미니 시장인데 채소와 과일, 생선 고기 등이 풍부하고 사람들이 활기차다. 낯선 이방인에게 기분 좋은 눈길을 던지고 카메라를 들이대도 전혀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다. 오늘도 망고를 지나칠 수야 없지, 과일가게에서 값을 물으니 1kg에 4만 동이란다. 다낭에서는 6만 동이었던 망고가 호이안 야시장에서는 5만 동이더니 이제는 4만 동, 가격이 자꾸자꾸 내려간다. 관광객 물가에서 현지인의 물가로 내려가고 있고 그만큼 우리 부부가 현지에 깊숙이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단 돈 2,000원에 잘 익은 망고로 골라서 먹기 좋게 잘라 칼집까지 내주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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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나와서 자전거로 달리다가 역시 허름한 길 가 카페에 들렀다. 카페라기보다는 대충 바나나 잎으로 가림을 한 원두막 정도라고 해야겠지만. 사실은 커피를 마시고 싶기보다는 방금 산 망고를 먹을 장소가 필요했던 터이다. 커피를 시키니 위스키 잔처럼 좁고 작은 유리잔에 뜨거운 에스프레소 커피를 넣고, 이걸 다시 냉수가 담긴 컵에 담아서 내 온다. 아마 적당히 식혀서 마시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커피를 마셔보니 생각보다 엄청 쓰고 달다. 베트남에 와서 며칠 동안 달달한 연유커피에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이건 너무 진하다. 아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뜨거운 물을 반 컵쯤 받아서 여기에 커피 두 잔을 함께 부어 희석하니 이제야 좀 마실 만하다. 커피값을 물으니 2만 동, 한잔에 500원에 새로운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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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잘 다니지 않는 제방도로를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에 산들바람이 가끔씩 얼굴을 만져주고, 강변을 따라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피어있다. 멀리 논 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도 보이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어떻게 돌아올까 걱정할 일도 없다. 적당히 달리다가 배가 고프면 사 먹고 피곤하면 돌아오면 그만이다.

새로운 동네가 나타났다. 시장을 지나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조그마한 이발소가 눈에 띈다. 젊은 이발사가 손님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온 정성을 다해서 조심스럽게 면도하고 있다. 이것도 체험이다 싶어서 면도가 되냐고 하니 기다리란다. 가격을 물으니 5만 동, 우리나라 돈으로 2,800원 정도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차례가 되었다. 사실 면도라는 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과정이다. 굉장히 날카로운 면도칼로 가장 약한 부위인 목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니 혹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막상 면도를 시작해 보니 그 느낌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날카로운 면도칼 어디에 그처럼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살에 닿는 감촉이 간질간질, 편안하다. 내가 그리 수염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사각사각, 한참이나 정성스레 면도를 마쳤다. 끝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파우더를 얼굴에 바르고는 뺨과 귓불의 솜털까지 깔끔히 면도해 준다. 거의 40여 년 동안 미용실만 다녔으니 이런 감촉들은 오래전에 잊혀 있었다. 그 추억의 감촉을 이곳 베트남에서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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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돌아와 주변 골목길을 탐방하다 보니 홈스테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비교적 깔끔해 보이는 주택가의 집인 데다가 제법 널찍한 마당이 있으니 방 안에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불쑥 들어가서 방이 있나, 방값은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하룻밤에 250,000동, 13,000원 이란다. 헉, 지금 호텔도 하룻밤에 28,000원으로 아주 흡족한 가격인데 거기에 반값이라니. 방을 둘러보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기투숙하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려본다. 방값 13,000 + 식비 25,000 +과일, 커피, 맥주 12,000 = 50,000원. 우리 부부가 하루 동안 잘 먹고 마시고 쉬는 데 충분한 비용이다. 물론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기 위해 관광 상품을 사려면 추가로 돈이 들 테고, 더 좋은 숙소를 구한다면 방값만으로도 10만 원쯤 내야 하겠지. 그러나 그건 돈은 있고 시간은 없는 젊은이들의 선택이지, 돈 없고 시간 많은 은퇴백수의 선택은 아니지 않은가? 부부가 하루에 5만 원이면 한달살이에 150만 원, 항공료에 여행자보험이니 기타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300이 안 든다는 말이다. 그래, 물가도 싸고 밥도 맛있고 야경도 좋은 호이안을 떠날 이유가 없다. 일단 일주일쯤은 뒹굴거리기로 맘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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