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 보니 비가 내린다. 아직 더 자도 될 시간에 나를 깨운 것이 빗소리인 것도 같다. 베트남은 벽과 지붕이 모두 얇다. 지붕은 주로 점토기와를 얹었는데 실내에서 보면 서까래 위에 기와가 얹힌 모습이 바로 보일 정도니, 빗소리가 리얼하게 들리는 건 당연하다 싶다. 그런데 이 시간에 잠이 깨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다. 쓸데없이 일찍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으로 몸에 밴 악습이다. 게다가 옆에는 아내가 낮게 코를 골며 편하게 자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몸을 옆으로 돌려 쿠션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포근히 안겨본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졸리지 않은데도 가슴을 토닥거리면, 열 번도 못 버티고 잠에 빠져드는 게 참 신기했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를 재우던 엄마의 손길이 떠오른 건 그만큼 편안하다는 뜻이리라. 어느새 나는 다시 깊은 아침잠에 빠져든다.
눈을 떠 보니 아홉 시가 넘었다. 어젯밤 10시쯤 잠들었으니 거의 11시간을 달게 잔 셈이다. 겨우 서너 시간 자전거와 약간의 골목 산책을 했을 뿐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잘 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새벽 비행기의 여독이 일주일이 가깝도록 안 빠진 건지, 아니면 영상제작을 가르친답시고 초등학교를 오간 지난 몇 개월의 피로가 쌓인 건지, 아니면 30여 년 아이들 키우고 직장 생활하느라 쌓인 묵은 피곤이 이제야 봄눈 녹듯 풀리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내에게 배가 고프냐고 물으니 아직은 괜찮단다. 물을 끓여서 어제 산 재스민 차를 내려 한 잔씩 마시고는 간단한 스트레칭에 아내의 발과 등을 마사지한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고 사진을 정리하고 sns를 확인하고, 한참을 꾸무럭거리다가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약간 출출해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몹시 배가 고프단다.
주섬주섬 비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지난번에 한번 들렀던 국숫집, 포 슈어에 한 번 더 들를 참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여행 안내서에 의하면 올드타운에서 가장 맛있는 쌀 국숫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게다가 값도 만만해서 걱정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곳이란다. 화이트 로즈와 구운 닭에 밥이 나오는 껌가, 돼지고기가 얹힌 비빔국수 까오 라우를 시켰다. 쌀가루로 만든 딤섬 같은 화이트 로즈는 애피타이저 삼아 조금씩 나눠먹고, 비빔국수와 닭고기 밥을 메인으로 나눠 먹을 요량으로 말이다. 먼저 화이트 로즈가 나왔다. 화이트 로즈, 말 그대로 백장미처럼 생긴 이 요리는 쌀가루를 얇게 반죽하여 만든 하얗고 야들야들한 물만두다. 속을 아주 조금만 넣고 만두피를 얇게 살려서 마치 꽃처럼 펼친 위에 바삭거리는 고명을 얹었는데 구운 마늘이라고 한다. 접시에 놓인 모습부터 눈을 즐겁게 한다. 야들야들한 쌀로 만든 물만두가 하얀 꽃잎을, 가운데의 노르스름 바삭바삭한 구운 마늘 고명이 꽃술을 이루었다. 이걸 달콤 매큼 새큼한 소스에 살짝 찍어서 입에 넣으니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간질간질 파삭거리는 식감과 상큼한 맛이 마치 동화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행복의 웃음이다. 워낙 부드럽기에 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입에서 스르르 녹아 넘어가는 듯한데 여운을 느끼기에 참을성이 부족하여 두 번째 화이트 로즈를 입에 넣었다. 행복하다. 무얼 먹으며 행복하다는 걸 이렇게 느끼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저 맛있다거나 훌륭하다는 정도의 형용사가 어울리는 게 음식 아닌가? 그런데 행복하다는 다소 폭넓고 추상적인 단어가 튀어나온다. 아내도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다. 다섯 개 중에 세 번째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음, 행복하네'란다. 보통은 세 번째를 나에게 양보하는 아내가 마지막을 집었다는 건 맛있거나 남편이 미덥다는 뜻이니 둘 다 좋은 일이다. 냉큼 하나를 더 시켜서 이번에도 아내에게 3개를 건넨다.
잠시 후에 돼지고기를 얹은 비빔국수인 까오 라우와 돼지고기 덮밥인 껌 가가 나왔다. 베트남에 온 지 일주일째, 아직은 베트남 음식에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다. 베트남 음식은 기본적으로 진한 고기육수에 매큼하고 상큼한 편이다. 거기에 신선한 채소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 입맛에 조금도 거슬림이 없다. 다만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꼭 고수를 빼 달라고 해야 한다. 내가 배운 베트남어는 "라우 무이"다. 마지막으로 비빔국수인 까오 라우에 치킨을 얹은 덮밥까지 먹는데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이거 뭔지 2% 부족할 듯싶다. 재빠르게 소고기 쌀국수인 퍼 보를 시켰다. 진하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국물 맛에 온몸이 깨어난다. 몇 숟가락 밥을 뜨고는 뜨끈한 퍼 보 국물을 퍼 먹으니 세상이 다 만만해 보인다. 이렇게 둘이 5개의 요리를 시켜서 실컷 먹고 돈을 내려니 295,000동, 한국돈으로 치자면 16,000원 정도, 한국에서 칼국수 한 그릇씩 사 먹을 돈이다.
약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호이안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과일을 사기 위해서다. 잘 익은 망고가 kg에 3만 동, 새큼한 패션푸르트가 3만 동, 망고스틴이 20만 동(베트남 과일치고는 비싼 편이다), 모두 합쳐서 26만 동에 한 보따리를 샀다.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자니 아내가 그냥 집에 가서 마시잔다. 하기야 물가가 싸다고는 해도 백수의 배낭여행에 절약은 해야겠지, 게다가 멋진 마당과 발코니가 있는 방까지 빌렸으니 굳이 카페에서 마실 필요가 없다 싶어 집으로 향했다.
늦은 잠에서 일어나 겨우 밥 먹고 왔는데 또 졸린다. 핑계를 대자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다. 달달한 G7 커피를 발코니에서 폼나게 마시자마자 다시 눈이 감긴다. 약한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맞이한다. 피곤할 때 허겁지겁 빠져드는 끈적한 잠이 아니라, 혀 끝으로 핥아먹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낮잠이다. 보통 해외 여행자들에게 비오는 날씨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백수에게, 그것도 물가 싼 베트남에서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할 일도, 걱정거리도 없는 데다가 뒹굴거리며 게으름을 피운 들 누구 하나 눈총 줄 사람도 없으니 이처럼 확실한 여행의 행복도 없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