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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다낭은 처음이지?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2

by 심웅섭

어디선가 들려오는 높은 주파수의 소음에 눈이 떠졌다. 아침 7시, 잠든 지 세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나의 잠을 깨운 건 무얼까? 커튼을 들쳐보니 호텔 바로 건너편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다. 부모들이 분주하게 오토바이로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있고, 일찍 온 녀석들은 운동장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축구를 하거나 이리저리 뜀박질이다. 소음의 정체는 수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만들어 내는 높은 주파수의 재잘거림이었다. 어쩐지 잠에서 깨면서도 기분이 좋더라니, 늦잠을 방해받았건만 내 입에는 잔잔한 미소가 스민다.

자세히 보니 창문이 열려있다. 환기를 위해서 호텔 직원이 열어놓은 걸 모른 채 잠들었나 보다. 그 창문을 통해 아이들의 소음이 들어왔다는 뜻이지만 창문이 열린 것도 모를 정도로 따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문을 닫고 다시 눈을 감아보지만 냉큼 잠이 와 주질 않는다. 뒤이어 눈을 뜬 아내와 상의 끝에 이른 조식을 하기로 결정, 맨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하룻밤에 26,000원짜리 호텔이니 식사의 질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를 안 하고 올라갔는데,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준이다. 빵과 시리얼, 쌀국수와 볶음밥 그리고 몇 가지 이름 모를 베트남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대체로 느끼하지 않아 입에 맞는다. 용과, 용안, 수박, 자몽 등의 과일들, 그리고 달달한 연유를 넣어 마시는 베트남식 커피도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쌀국수에 파릇파릇 채소 조각들이 들어 있는데 약간의 고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맛을 보니 쿰쿰하다. 역겨운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 신경이 쓰인다. 직원에게 고수를 빼고 달라는 뜻을 전하려는데 이게 만만치 않다.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번역기를 돌려보지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나중에야 겨우 뜻이 통했는데 고수가 베트남어로 '라우 무이'란다. 음, 이건 생존을 위해서 외워야겠군. 몇 번을 반복해서 입에 올려본다.

"노 라우 무이"

아침을 먹고 나서 산책을 나선다. 호텔에서 두 블록쯤 너머에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해수욕장인 듯 모래사장(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미케 비치다)과 파라솔도 눈에 띈다. 날씨는 흐리지만 바닷가를 따라 산책을 할 참이다. 그러나 바닷가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 부부의 발길을 먼저 잡은 것이 있다. 바로 과일 가게. 십 대로 보이는 자매 둘이 낄낄거리다가 우리를 맞는다. 망고 두 개에 삼천 원 남짓,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썰어서 기다란 대나무 꼬치와 함께 대령해 주니 황송하다.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열대과일 맛이다......, 달고 부드럽고 깊은 맛의 조화로움, 두리안을 닮은 약간 쿰쿰한 냄새가 코를 감싼다. 망고를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이처럼 복잡하고 깊은 맛은 처음이다. 어쩌면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완숙된 과일이라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품종이나 재배지의 특성으로 그런 맛을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은 채 망고를 입에 물고 약하게 코로 숨을 내 쉬어본다. 입에서는 부드러운 촉감을, 그리고 코로는 몽환적인 냄새에 취해본다. 열대 과일의 맛에서 남쪽나라를 느껴볼 참이다.

우리나라 과일들은 대체로 아삭한 식감에 달고 신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표 과일인 사과가 그렇고 배나 포도 등도 그렇다.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한 입 베어 물면 머리에 시원함이 팍 하고 터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삭아삭 씹어서 삼키면 건더기와 과즙이 적당한 비율로 목을 타고 넘어가고 이번에는 몸이 시원해진다. 그런데 열대과일은 조금 다르다. 망고를 입에 넣으면 눈이 감기면서 살짝 졸린 듯, 혀를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한 두 번 씹으면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한국 과일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열대 과일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한국사람들이 열대지방 사람들에 비해서 부지런하다고 하는데, 어쩌면 과일 맛에서도 비슷한 차이가 있구나 싶다.

해변을 따라 걷는다. 베트남이라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정도, 반팔을 입은 사람과 겨울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당연히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 없고 우리처럼 해변을 걷거나 앉아서 바라보는 이들만 눈에 띈다. 우리 부부는 걷는 편이다. 이렇게라도 하루 일당(하루치 걸을 거리)을 채우리라. 가로수는 모두 야자나무다. 어떤 나무에 매달린 야자는 노르스름해서 먹어도 될 것 같다. 길에는 야자열매가 여기저기 떨어져 뒹군다. 혹시나 싶어서 뒤집어보니 겉껍질만 남아있다. 야자열매가 뒹구는 가로수 아래,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한다. 간혹 가랑비가 오가는 흐린 날씨가 나름대로 운치 있게 느껴진다.


길을 걷다가 재미있는 풍경들을 발견했다. 인도 가운데에 향을 피우는 제단이 있다. 아마도 남방불교의 제단이리라. 어쨌든 사람들이 숫하게 지나다니는 길 가운데에 설치된 걸로 봐서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종교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삼륜차로 개조해서 짐을 싣고 다니는 모습도 흥미롭다. 자칫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현지 사정에 맞게 개발된, 그야말로 적정기술인가 싶다. 오토바이 옆에 장작불 곤로를 매달고 다니는 노점상도 보인다. 저러다가 오토바이에 불이라도 붙으면 어쩌나 싶지만 경험상 별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뭔가를 끓여서 파는 것 같은데 마침 주인이 안 보여서 알아내지는 못했다.


한 시간쯤 걸어서 한 시장에 도착했다. 다낭에는 큰 재래시장이 두 개란다.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꼰 시장과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한 시장이 그것이다. 두 시장을 모두 둘러보니 그 차이가 확연하다. 꼰 시장은 농산물과 해산물들이 주를 이루는데 손님들의 대부분이 현지인이고 관광객은 어쩌다가 눈에 띄는 정도라면, 한 시장은 거의 모든 손님들이 관광객, 그중에서도 한국사람이다. 커다란 2층 건물에 옷과 잡화를 파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마치 7-80년대의 동대문 시장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좁은 시장 사이로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면서 쇼핑을 하는데 대부분 느긋하고 만족스러운 표정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물가가 한국보다 제법 싸다. 물론 품질은 조금 조악해 보이지만 말이다. 아내는 걸을 때 편하게 입는다고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 한벌을 12,000원 정도에, 노스페이스 고어텍스(^^) 재킷을 22,000원 정도에 샀고 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4,000원에 샀다, 물론 약간의 흥정을 거친 후에.

환전도 이곳에서 하는 것이 유리하다. 100달러를 은행이나 호텔에서는 220만 동으로 바꿔주는데 이곳의 금은방을 찾으니 235만 동을 쳐 준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자면 8300원 정도의 이익이니 이왕이면 이곳에서 환전하기를 권한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다. 100달러 지폐에도 가격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직원들이 유심히 지폐를 살피다가 한 장을 따로 떼어 놓고 나머지만 계산한다. 이건 왜 안되느냐, 위조지폐냐 물었더니 이건 새 돈이라서 값이 다르단다. 조지 워싱톤의 초상화를 가르치면서 뭔가 다르다는 설명을 하는데 이해는 못했고, 어쨌든 신권이 약간 가격이 높다. 그러나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콩카페에 들렀다. 여행안내서는 물론이고 유튜브나 인터넷의 웬만한 여행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를테면 한국 관광객의 다낭 필수코스가 바로 콩카페다. 사실은 일부러 찾아간 것은 아니고 시장에서 벗어나 밥이나 먹을까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것이다. 내부는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느낌, 정확히는 베트콩의 사무실을 옮겨 온 듯한 분위기의 폐허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낡고 어둡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의 조명과 소품들이 썩 잘 어울린다. 코코넛 슬러시가 유명하다는데 찬 음료가 부담스러운 우리 부부는 연유커피와 코코넛커피를 시키고 이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창에는 독특한 실내의 조명과, 바깥으로 보이는 용다리와 한강의 야경이 합쳐져 신비스러운 장면이 만들어졌다. 특이한 맛의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내다본다. 이곳의 손님들의 절반 정도는 한국사람으로 보이고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차량도 큼직하게 한글로 써 붙이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경기도 다낭 시라는 우스갯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듯싶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 3-40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가서 이런저런 추태를 보인다는 기사들을 종종 대하곤 했다. 함부로 떠들고 화를 내거나 술에 취해서 달러를 흔들며 현지인을 무시한다는 식의 기사들 말이다. 실제로 해외여행이나 출장에서 이런 경우들을 보아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조용하다가 유독 동남아시아나 남미 쪽, 그러니까 조금 못 산다고 느끼는 나라에서는 큰소리를 내는 한국인들, 그래서 어쩌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만나면 조용히 피해 다니곤 했었다. 쓸데없이 허세를 부리며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모습들이 창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다낭에서 만나본 한국인들은 예외 없이 조용하고 매너 있고 무엇보다도 여유로운 표정들이다. 옷차림과 행동에서도 여유와 매너가 함께 느껴진다. 거기에 젊은이들은 영어도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한다. 괜히 기죽어서 쭈삣거리다가 술에 취해서 달러를 흔들며 추태를 부릴 이유가 없는 거다.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30여 년, 한세대가 흘렀다. 그사이 경제 수준도 높아져서 이제는 세계 10위권에 오를 정도이니 여행 문화도 그만큼 발전한 것일까? 이렇다 보니 한국인이 득실거리고 한국말 간판이 흔한 다낭의 풍경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커피를 마시고 나오니 콩카페 앞 노상쉼터에 고구마와 옥수수를 굽는 노점이 펼쳐졌다. 물어보니 공짜란다. 카페 이용고객에게 주는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다. 궁금해서 고구마를 하나 부탁했다. 한참을 기다려 받아먹었는데, 한국의 꿀고구마와 비교하면 싱거운 맛이다. 어쨌거나 공짜이니 고맙다.


근처의 쌀 국숫집에 들렀다. 다낭을 소개하는 여행 책에 실릴 만큼 유명한 음식점이다. 넓지 않은 가게에 한국사람들이 그득하다. 종업원들도 모두 서툰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테이블마다 손님들도 모두 한국사람, 여기가 베트남이 맞나 싶을 정도다. 테이블 구석에는 인스타나 구글맵에 사진과 평점을 올려주면 음식값을 할인해 준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국 관광객,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을 적극 유치하겠다는 거다. 그리고 옆에는 이런 글도 씌어 있다.


"어서 와, 다낭은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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