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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베트남으로 떠나 볼까?

백수에게 딱,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1

by 심웅섭

우리는 충북 보은군의 산골동네에 살고 있는 시골부부다. 정년퇴직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은퇴부부이며 한편으로는 베이비 붐 세대, 7080 세대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젊었고, 많지는 않지만 연금 덕에 그럭저럭 절대빈곤은 면한 상태다. 거기에 약간의 문화생활이나 여행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신세대 노인족이다. 아직 남아있는 체력과 넘치는 시간에 그런대로 해볼 만한 주머니 사정, 우리 인생에서 한 달 여행을 나서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처음에는 라오스로 떠날 요량이었다. 그런데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베트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서는 약간 높은 수준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여행하기에 부담 없는 물가, 그리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깔끔한 여행 환경이 고려대상이 됐다. 백수의 주머니 사정상 앞으로 주로 동남아시아나 중국 정도를 여행지로 삼을 텐데, 그렇다면 앞으로 물가가 더 오를 가능성이 큰 베트남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아내의 몫이었고 나는 받아들이는 형식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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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 충북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 공항으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중

KakaoTalk_20221214_090333127_04.jpg 인천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창밖으로 우리가 타고 갈 비엣젯 항공기가 보인다.

한 달 전에 비행기표를 끊었다. 스카이스캐너라는 앱을 통해 검색해 보니 비엣젯이라는 베트남 저가항공사의 항공권이 제일 싸다. 인천에서 다낭까지 항공권이 겨우 13만 원대, 여기에 약간의 부대비용을 더하니 둘이 33만 원쯤으로 해결된다. 헐, 싸다. 베트남까지 버스를 타고 가도 이 가격은 하겠구나, 싶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비엣젯의 좌석 간격이 좁아서 승차감(?)이 최악이라는 글들도 보이지만, 뭐 가격 생각하면 웬만한 불편함은 감수할 생각에 무시하기로 했다.


드디어 출발일이 다가왔다. 초등학생들에게 스마트 폰으로 영상앨범 만드는 것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이게 금요일에 끝나고 바로 월요일에 출발이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청주 가경터미널을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 비행시간이 밤 10시 40분인데 혹시나 퇴근시간 정체가 될까 걱정하여 저녁 6시 30분에 도착했다. 7시 40분에 체크인 시작, 항공료가 싼 대신 허용된 짐 무게가 적다. 일인당 7KG의 가방이 기내에 무료 반입이 허용되고 짐을 부치려면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아무려면 이 정도의 불편함에 불평할 가격이 아니다. 좌석은 좁았지만 그냥저냥 탈 만 했다. 무릎에서 앞 좌석까지 10cm 정도의 여유공간, 나의 작은 키가 지금만큼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좁은 좌석에서 눈을 감고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어느 순간 툭 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옆자리의 아내가 몸을 뒤척이다 건드린 듯싶다. 잔뜩 웅크린 채 인상을 쓰고 불편한 잠을 자는 아내,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든다. 평생 비즈니스 석 한번 타 보지 못하고 좁은 이코노미 석만, 그것도 어쩌다가 겨우 한 번씩 타 보게 만들었구나. 이코노미 아니라 입석으로라도 외국여행 나가는 것 자체가 선택받은 것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찡그린 채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가 않다.


새벽 한시쯤 다낭공항에 도착, 입국심사를 하고 짐을 찾으러 가는 길에 유심을 파는 가게가 나타났다. 예쁜 판매원이 제법 또렷한 한국말로 유심을 사란다. 어차피 공항에서 구입하기로 했으니 망설임 없이 다가섰는데, 그런데 이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유심을 갈아 끼우고 셈을 치르려 돈가방(전대)을 열어보니 돈이 없다. 현지에서 환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달러로 환전을 해 왔는데, 이 달러 다발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길한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친다. 일주일 전쯤, 은행에서 찾은 달러 다발을 전대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어 책장 사이에 끼워 넣었었던 기억 말이다. 아직 출발 날짜가 며칠 남았으니 잘 숨겨두었다가 출발하기 전에 전대에 다시 넣을 요량이었는데, 그만 빈 전대만 들고 온 것이다.


헐, 폭탄이 터졌다. 단 돈 1달러도 없이 베트남에 와 버렸다. 해외여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 중의 하나다. 난감해하며 신용카드로 결제하자고 하니 유심 파는 아가씨가 밖에 나가서 ATM에서 돈을 찾아 오란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들어오기 힘들 텐데 싶지만 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 출입을 통제하는 직원에게 돈을 찾아서 다시 오겠다고 하니 절대로 안된단다. 그럼 아내를 안에 두고 내가 돈만 전달하면 되냐고 하니 그건 된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가 급한 마음에 미처 아내에게 상황설명을 하지 않고 덜렁덜렁 걸어 나왔고 뒤이어 아내도 내 뒤를 따라 보안구역을 나와버렸다. 이제 돈을 찾아도 돌아가서 지불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어쨌거나 돈부터 인출하자, ATM기 앞에 서 서보니 영어 문자들이 생소하다. 대충 눈치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금인출 버튼을 누르니 잠시 후 인출에 실패했다는 안내문이 덜렁 나타난다. 잔고가 부족인지 비밀번호가 잘못됐는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는 지극히 무책임한 안내문이 말이다. 두세 번 반복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옆의 기계로 옮겨보니 이 기계는 현금인출이 아예 안된단다. 역시 현금이 떨어졌는지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에 대한 안내는 없다. 이제 슬슬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당장 10달러의 유심 값은 어쩔 거며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는 탈 수 있을까? 호텔비야 이미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치고, 아침에 일어나면 은행을 찾아가야 할 텐데 택시비는 또 어쩔 건가? 다행히 아내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다. 처음에는 그것도 못 챙겼냐고 몇 번 야단을 치더니 허허 웃으면서 '이것도 재미있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지난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나름 여행 근육이 키워졌나 보다. 그래 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아예 파산한 것도 아니고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니 어찌어찌 해결할 방법이야 없을쏘냐?


유심을 파는 아가씨가 보안구역을 통과해 나왔다. 기다리다 못해 밖으로 나왔나 보다. 같이 도와주는데도 마찬가지로 현금인출이 안된다. 생각다 못한 아가씨가 신용카드로 결제하란다. 보안요원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결제를 했다. 이것으로 문제 하나는 풀린 셈이다. 두 번째 문제는 택시비, 그랩(grab)을 설치하고 부르면 온다는데 이것도 현금결제란다. 물론 현금은 1달러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국 돈이 있다. 혹시나 해서 만 원짜리와 오만 원 권을 각각 한 장씩 넣어둔 게 생각이 났다. 택시기사에게 '한국 돈 오케이?' 물으니 2만 원을 내란다. 미리 알아본 가격의 서너 배는 되는 금액이다. '노우, 안 탄다'라고 버티며 그랩을 깔고 있으니 다시 와서 만원이라도 내란다. 어느새 여행객들은 다 빠져나가고 우리 부부만 남았으니 택시기사로서도 허탕 치는 것보다는 만원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왔나 보다.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3시,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다섯 시다. 자고 있는 스태프들을 깨워서 겨우 방에 들어왔다. 럭셔리 트윈룸이다. 트윈베드에 하얀 시트가 정결하다. 욕실도 크고 깔끔하다. 이 정도의 호텔이 조식 포함 하루 26,000원이라니 황송하다. 대충 짐을 풀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전대를 확인했다. 내가 열어 본 주머니 말고 뒤쪽에도 지퍼가 있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다시 헐, 달러 다발이 아주 고이 모셔져 있다. 다른 곳에 옮겼다는 내 기억은 잘못된 가짜 기억이었다. 아주 잠시, 돈을 다른 곳에 옮겨 놓을까를 고민했던 것이 실제 기억으로 불쑥 떠오른 것이리라. 순간 허탈감과 안도와 행복감이 뒤섞인 복잡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허허허 허 허......, 자칫 평범할 수도 있는 베트남 여행의 시작이 이로써 다이내믹한 이야깃거리가 되는구나 싶다.


새벽 네시, 한국으로 치면 여섯 시다. 비행기에서 불편한 자세로 눈을 붙이긴 했지만, 하룻밤 치 잠을 도둑맞은 셈이다. 내일을 위해서 잠을 청해 보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한다. 이국땅에 왔다는 약간의 설렘, 거기에 달러 뭉치의 여운 또한 남아있으리라. 이제부터 한 달간의 짧지 않은 베트남 여행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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