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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정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16

by 심웅섭

베트남에 오기 전, 내 상상 속의 베트남은 울창한 정글, 뱀과 거미와 온갖 독충들이 우글거리고 낮에도 해를 보기 힘든 무덥고 습한 밀림이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주로 월남전을 배경으로 들은 이야기, 소설, 영화들에서 주워 모아 합성한 것들이었다. 어렸을 때 라디오를 통해서 용감한 백마부대나 맹호부대 용사들이 정글에서 베트콩과 싸워 이겼다는 승전보를 듣곤 했었다. 나중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여행을 와서 아직까지 한 번도 정글을 본 적이 없다. 다낭에서 호이안을 거쳐 달랏까지, 장장 13시간을 거쳐 오면서도 (물론 이동시간은 밤이었다^^) 내 눈에 띈 것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나무나 대나무 숲 정도가 고작이었다.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정글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내가 정글지역이 아닌 곳만 골라 다녀서인가, 아니면 몇 십 년 만에 정글이 사라진 것일까? 그런데 바오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깟띠엔 국립공원이 있단다. 여기에는 긴팔원숭이가 새벽송을 하고 악어가 사는 늪이 있단다. 그렇다면 당연히 원시정글일 터, 드디어 베트남에서 정글을 본다는 기대감에 무턱대고 깟띠엔 국립공원을여행의 목적지로 삼았다.


오늘은 2023년 1월 2일, 모두들 아쉬운 신정연휴를 끝내고 출근을 하는 날이다. 우리 부부는 출근 대신 새로운 목적지, 남깟띠엔으로 이동한다. 정들었던 바오록 농가를 떠나 택시로 한 시간 반을 달렸다. 택시비는 친구가 된 관리인 모 아줌마의 주선으로 80만 동, 불과 4만여 원으로 책정되었다. 오전 11시에 숙소를 출발, 좁은 22번 국도에 차들이 가득이다. 이런 지방 국도에 차가 많은 것은 연휴를 끝내고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한참을 달리니 창 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바오록 부근에서는 허름한 카페와 식당들이 길가에 즐비하더니만, 이제는 커피 대신 코코넛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아진다. 택시기사가 노점상 한 곳에 차를 세우며 잠시만 쉬었다 가잔다. 목이 말라서 그런가 보다, 우리 부부는 늦게 아침을 먹고 후식으로 잭프룻까지 먹은 터라 생각이 없어서 차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코코넛을 한 개가 아니라 세 개를 시키고 있다. 냉큼 내려서 대신 값을 치르려고 하니 완강히 자기가 살 테니 가만히 있으란다. 예의상 사양하나 보다 싶어서 다시 한번 지갑을 꺼내는데 제지하는 손이 조금 단호하다. 이럴 때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예의다.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하고 코코넛 두 개를 받았다. 약간의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 코코넛 주스가 달달하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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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베트남 남부의 깟띠엔 국립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숙소다. 사진을 미리 보고 잡기는 했지만 딱 만나는 첫인상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울창한 넓은 평지에 군데군데 숙소들이 방갈로처럼 자리를 잡았고 입구에는 식당을 겸한 사무실이 자리해 있다. 나무들을 살펴보니 이미 내 눈에 익숙해진 잭프룻도 보이고 이름 모를 연 핑크색 과일도 보인다. 나중에 이름을 물어보니 워터애플이란다.

배정받은 숙소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데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숙소에서 불과 20m 앞으로 동나이 강이 흐르고 있고 강과 숙소 사이에는 커다란 대나무들 사이로 멋진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는 야트막한 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는 해먹과 뒤로 눕힐 수 있는 안락의자가 2개씩 놓여있다. 저 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강물을 바라보고 해먹에서 낮잠도 자리라. 숙소는 두 개의 침대에 모기장이 쳐진 모습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왕과 왕비의 침실 같다. 깔끔하고 도시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묘한 분위기에 가슴이 들뜨기 시작한다. 흥분하여 이리저리 살펴보고 연신 찬사를 내뱉는데 왠지 아내는 차분한 느낌이다.


"아니, 여보 여기 좋지 않아?"


"뭐, 아주 좋지는 않아. 자기가 좋아할 것 같아서 선택한 거야"


잊고 있었다. 나보다는 아내가 좀 더 도시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어쨌거나 나를 위한 배려로 치고 즐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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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짐을 풀고 숙소 앞 전망대에 자리를 잡았다. 바오록에서 산 핀 드리퍼와 바오록의 몽 아줌마가 선물한 가루커피로 폼을 한 번 잡아볼 참이다. 컵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미리 부어놓고 핀 드리퍼에는 티스푼으로 세 숟가락의 커피가루를 넣는다. 슬쩍 태핑을 하고 물을 적셔 뜸을 들인 후에 손잡이가 잠 길듯 말 듯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핀 드립을 해 보니 살짝 쓴맛과 고소함 뒤에 달착지근한 향이 느껴져서 마실만 하다. 사실은 베트남에 와서 제일 불만이 커피 맛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라비카 커피를 손수 로스팅해서 매일 내려 마셨는데, 이곳의 커피는 내 입맛에 엄청 쓰고 달다. 벌써 20일이 되었으니 적응할 만도 한데, 커피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핀 드리퍼로 이렇게 내려서 마셔보니 그런대로 마실 만하다. 돈 주고 억지로 쓴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는 내가 내린 게 입맛에 맞으니 백수 여행객에게는 잘된 일이다.

평소 같으면 대낮에 술을 마시지 않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술이 빠질 수 없다. 사이공 캔맥주가 커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와 맥주, 평소에는 친하지 않을것 같지만 강물을 바라보는 대나무 숲에서는 썩 잘 어울린다. 사이공 캔맥주는 식료품점에서 단돈 11,000동, 한국돈으로 600원 정도이니 감사한 가격이다.

커피와 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강물을 바라본다. 먼저 받은 느낌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물의 색깔이 황토색인 데다가 제법 빠르게 흐르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졸졸거리는 여울소리, 하다못해 가끔씩 펄쩍 뛰는 물고기의 첨벙 소리라도 들릴만 한데, 고요하기 그지없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흐르는 황토색 강은 마치 주변의 소음마저 빨아들인 듯, 수많은 비밀과 위험을 감춘 살아있는 존재 같다. 맥주를 들고 난간 모서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내 시야에서 전망대의 난간조차 사라지고 강과 대나무 숲, 그리고 군데군데 흰 구름이 떠 있는 하늘뿐이다. 가끔씩 이름 모를 새소리가 적막을 깨는 것을 빼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 백수의 여행에 이처럼 평화로운 순간이면 만족이지 더 무얼 바라랴. 아무 생각 없이 강을 바라본다. 어느새 졸음이란 녀석이 옆자리에 앉더니만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한다. 뭐 걱정할 것 없다. 할 일도 없고 아내는 이미 해먹에서 낮게 코를 골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 보니 오후 다섯 시, 햇살이 힘을 잃었다. 고요한 강위로 배 한 척이 조용히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부부가 그물을 걷는데 남편은 두 발로 노를 저으며 그물을 끌어올리고 아내는 그물에서 고기를 따고 있다. 반쯤 누워서 발로 노를 저으며 손으로는 그물을 올리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애처롭다. 저 자세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지 상상이 가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낯설고 재미있는 여행지가 그들 부부에게는 삶의 현장이다. 매일이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이요, 벗어나고 싶은 굴레일 수도 있으리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체험한다. 그렇다고 미안해할 것은 없다. 이런 체험은 순간순간 역할을 바꾸며 공연하는 연극과도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 삶의 현장에 이들 부부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여행을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자와 현지인들은 서로에게 삶터를 보여주고 위안을 주는 관계이리라. 여행자가 현지인들을 우습게 볼 이유도 없고 현지인들이 여행자들에게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조금 편한 마음으로 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내려다본다.왠지 남편이 아내를 무척이나 아끼는 잉꼬부부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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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본다.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강을 서너 시간동안 바라보는 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도대체 왜 그럴까? 우선 강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내게는 낯선 경험이다. 충주시내 외곽의 과수원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나는 산과 들에는 익숙했을지언정 물과는 인연이 적었다. 바다는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가서야 처음 봤으니 당연한 얘기고, 강조차도 워낙 집에서 멀다 보니 그야말로 어쩌다가 한 번씩 만나는 정도였다. 그런 내가 바로 앞에 앉아서 강을 혼자 독점한다는 것 그 자체가 낯선 경험이다. 여행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나를 놓아두는 행위라면,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 순간은 어쩌면 여행 중에 만난 또 다른 여행이 아닌가. 게다가 고요해 보이는 강을 자세히 보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물들이 계속해서 흘러들고 흘러가고 있으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과일들이 툭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강에 비친 햇살도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약간 어두운 정도였다가 조금씩 붉은색을 띠며 물에 해그림자가 담기고, 그 붉은색이 진해지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 이러니 몇 시간째 한 자리에서 강을 바라보는 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강을 바라볼 수 있었던가, 젊었을 때는 일도 바빴고 아이들도 돌봐야 했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시끄러워서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하다못해 책을 보거나 잠을 잘 지언정 그저 멍하니 뭔가를 바라보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면 숙소 앞 전망대에서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바로 내게는 특별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강과 함께 밤을 맞이한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남깟띠엔 국립공원은 면적이 74,000여 km2이며 열대림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1960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고 월남전에는 고엽제로 숲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로도 주민들이 경작 등을 이유로 훼손하는 사례가 많았단다. 이후 1978년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결국 전쟁과 개발로 위협받던 숲과 생태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베트남 정글이 왜 사라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은 베트남 전에서의 고엽제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울창한 밀림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게릴라들을 잡기 위해서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숲을 말라 죽였다니, 사람도 사람이지만 그 숲에 사는 수많은 생명들은 어찌 되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서 정글이 복원되지 않고 경작지나 주거지로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바오록에서 본 아름다운 커피와 차 농장들도 그렇게 정글을 몰아내고 만든 경작지구나 싶다. 베트남의 울창한 정글을 구경한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왔는데, 아픈 베트남 역사의 단면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다.


어쨌거나 그나마 남아있는 정글이라니 기대가 된다. 어둠속, 멀리서 묘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쩜 저 녀석이 노래하는 원숭이, gibbon이 아닐까? 만남을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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