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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아니라 단기 거주자입니다

은퇴부부의 베트남 여행기 15

by 심웅섭

언덕 위의 멋진 숙소, senvilla를 떠나야 한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룻밤 4만 3000원 정도의 가격에 조식이 포함되고 훌륭한 전망과 한적한 산책길, 그리고 환상적인 낙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연말이면서 주말인 사나흘 동안 예약이 꽉 차서 방이 없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방을 옮겨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 부부가 숙소를 선택하는 요령은 이렇다. 먼저 여행지를 정하고 나서 아고다나 에에 비앤비 등의 앱을 통해서 부근의 숙소를 찾는다. 위치가 적당한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조식은 포함인지 등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리뷰들을 살펴본다. 그런데 이렇게 정한 숙소는 길게 예약하지 않고 대략 2-3박 정도만 예약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내가 가는 여행지가 마음에 드는 곳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미리 정보를 가지고 가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는 가서 직접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리 예약을 길게 잡거나 특히 결제까지 한 경우라면 자칫 숙박비에 볼모로 잡혀 억지로 더 머물거나 숙박비 일부를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 이걸 피하려면 우선 최소한의 기간으로 예약을 하는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아무리 숙소의 사진과 리뷰등으로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직접 머물러 보면 뜻밖의 문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어떤 숙소는 도착해 보니 교회 공동묘지 앞이기도 했고, 어떤 숙소는 온수가 뜨겁지 않아서 샤워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또 어떤 숙소는 주방 기구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고 청소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직접 가서 이삼일 정도 머물러 보고 계속 있을지, 다른 곳으로 갈지를 결정하는 게 현명하다는 거다.

세 번째 이유는 부근에 더 멋지고 싼 숙소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아고다니 에어비앤비 등에 등록된 숙소는 비교적 젊은 사람이 주인이거나 가족인 경우가 많다. 오래전부터 영업을 해 온 나이 드신 분들은 그런 새로운 영업방식에 적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지에서 발품을 팔면 더 싼 가격에 괜찮은 숙소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일단 이삼일 예약한 곳에 머물다가 마음에 들면 연장을 하거나, 주변에 더 좋은 곳이 있으면 한 번쯤 옮기는 게 우리 부부가 습득한 요령이다. 물론 이런 방법들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비교적 여유 있게 여행하는 경우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게다가 자칫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기도 한다. 내가 찾는 장소에 충분히 숙소가 없는 경우, 그러니까 유명한 관광지이거나 관광시즌이라면 자칫 숙소가 없어서 고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sen villa를 떠나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우인데, 12월 31일부터 3일간 연휴기간인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덕에 약간의 낭패를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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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약간 더 저렴한 숙소를 잡았다. 바오록 도심에서 10분쯤 떨어진 동네, 큰길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아늑한 단독주택이다. 숙박비는 하룻밤에 18,000원 정도, 믿기 힘들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집 전체를 빌렸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정원, 아니 과수원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500평은 돼 보이니 말이다. 과수원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내가 이름을 아는 것들만 먼저 보면 바나나, 파파야, 잭프룻 정도다. 겨울인데도 모두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바나나와 파파야는 초록색으로 아직 덜 익은 듯싶은데 잭 프룻은 덩치도 작은 녀석 하나가 노르스름하고 껍질이 살짝 말랑말랑, 잭 프룻 특유의 살짝 썩은 냄새가 은은히 감돈다. 당분간 나는 이 녀석들의 주인님이시다. 둘러보며 하나하나 만져보고 인사를 건넨다. 마트의 진열대가 아니라 나무에 달려있는 과일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라면 이런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 단기거주자 정도는 돼야 누릴 수 있는 특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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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거주자의 일과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맨 먼저 밥을 안치고는 정원, 아니 과수원을 걸으며 나무들과 꽃과 풀들을 한 번씩 만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이때 내 모습은 마치 영지를 둘러보는 영주처럼 위풍당당, 여유만만이다. 그 사이 아내는 반찬을 만든다. 오늘은 닭고기 볶음에 채소샐러드, 그리고 며칠 전 한국식품점에서 구입한 김치가 차려졌다. 물론 조금만 걸어 나가면 싼 값에 아침식사를 파는 로컬식당들이 있다. 그러나 세수도 하지 않은 푸스스한 얼굴로 먹으러 나가기도 귀찮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해 주는 밥을 먹는 게 마음이 편안하다. 그사이 나는 간단히 집안청소를 마치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한다. 지금까지 묵었던 호텔이나 빌라에서는 하지 않던 일상들이다. 모두 남의 손에 맡기고 놀기만 하면 되니 행복했는데, 보름쯤 지나 보니 약간의 가사노동이 그립다. 식사 준비에 청소에 빨래까지 하고 나니 무언가 하루가 꽉 찬 느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광객에서 여행자로, 그리고 여행자에서 단기 거주자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다. 기분이 좋다.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베트남 커피를 내려 마신다. 먼저 핀 드리퍼에 커피를 한 스푼정도 넣고 구멍이 송송 뚫린 덮개로 톡 톡 두 번 정도 태핑을 한다. 여기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서 20초 정도 뜸을 들인 후에 손잡이가 잠 길듯 말 듯 높이로 물을 붓는다. 내려진 커피는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쓴맛에 단맛이 묘하게 믹스되어 있다. 그런데 너무 진한 에스프레소를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여기에 나만의 과정을 추가해서 새로운 드립법을 개발했다. 서버로 쓰이는 컵에 미리 뜨거운 물을 5-60cc 정도 부어놓고 드립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린 커피는 적당한 쓴맛과 단맛, 그리고 고소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제법 마실만 하다.


사실 베트남에 여행 와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 커피였다. 처음에는 신기한 기분에 카페에서 파는 달달한 베트남 연유 커피를 마시곤 했지만, 자칭 커피 마니아인 우리 부부에게 쓰고 단 맛은 전혀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마트에서 가루커피와 핀 드리퍼를 사다가 내려 마시는 걸 본 관리인 아줌마가 새로 볶은 커피가루를 두 봉지나 가져왔다. 그리고는 마트에서 산 가루커피를 버리란다. 이 정도로 말할 때는 커피맛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냉큼 쓰레기 통에 버리고는 아줌마가 구해 준 가루커피로 드립법을 배워서 시작한 것이 위의 레시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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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우당탕탕 엔진소리가 소란하다. 이게 뭔가 싶어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바로 우리 과수원과 담을 맞댄 농가에서 뭔가 타작을 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고 살펴보니 이 지역의 특산물, 바로 커피를 탈피하는 중이다. 자칭 커피 마니아이고 보니 커피와는 제법 아는 척하고 지내는 사이지만, 사실 커피를 널어 말리는 모습이나 지금처럼 탈곡하는 장면은 본 적이 없다. 나무에 달린 커피조차도 불과 며칠 전에 처음 보았으니 말해 무엇하랴. 신기한 마음에 조금 더 다가가 본다. 엄청난 소음과 먼지를 내는 탈피기에 잘 마른 커피열매를 부으면 배출구로 내가 아는 커피콩(사실은 씨앗), 그린 빈이 우르르르 쏟아진다. 그걸 자루에다 넣어 묶으면 탈피가 완성된다. 호텔이나 빌라에서 머물렀다면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다니, 단기거주자로 변신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싶다.


가벼운 짐을 챙겨 자가용을 타고 집을 나선다. 자가용은 다름 아닌 오토바이, 달랏에서 부터 거의 매일 오토바이를 빌려 쓴다. 하루 임대료가 15만 동, 대충 8,500원쯤이니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대부분의 숙소에서는 이 가격이면 오토바이를 빌려준다. 사실 단기거주자에게 오토바이는 필수품이다. 하루종일 집에만 머물 수 없으니 장을 보거나 밥을 먹으러, 혹은 차를 마시러 나가는 기본 활동을 위해서도 오토바이는 필요하다. 가까운 등산로를 찾거나 시내 관광을 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택시비가 훨씬 더 비싸기도 하거니와 아무 데서나 택시를 부르기도 어렵다. 게다가 바오록은 그랩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다. 두세 번 스마트폰으로 예약버튼을 눌러보니 근처에 차가 없다는 메시지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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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는 구름의 언덕, cloud hill이다. 숙소를 관리해 주는 몽 아줌마가 추천해 준 곳이다. 구글맵에 검색하니 4km, 멀지 않은 거리다. 큰 도로에서 금방 벗어나서 한적한 아스팔트 길로 들어섰다. 길은 넓고 다니는 차나 오토바이는 거의 없다. 상큼한 오전 공기를 가르며 오토바이로 달린다. 도시에서는 시끄럽고 위험해 보여서 싫던 오토바이가 나 혼자 달려보니 참으로 낭만적인 교통수단이다. 자동차를 탈 때와 오토바이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자동차는 편하고 안전하지만 바깥 공간과는 분리된 공간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반면 오토바이는 공간의 일부로, 하나의 공간 속에서 내가 이동하는 느낌이다. 적당한 바람이 상큼하게 내 뺨을 스치고 가슴이 뻥 뚫린다. 뒤에 앉은 아내도 무척 만족한 듯, 허리를 잡은 손이 가볍다.


구름의 언덕은 오토바이로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산보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언덕 밑에 주차를 하고 걷기로 한다. 정상까지 2km 남짓, 부지런히 오르면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시작부터 경사가 제법 급하다. 커피나무와 차나무를 심은 과수원 사이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걷는다. 커피와 차나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차나무가 위주이고 커피나무는 중간중간 심어져 있는 정도다. 커피와 차는 세계 여러 곳에서 기호음료로 경쟁을 벌이는 숙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친근한 이웃이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길 옆뿐 아니라 우리가 오르는 산 전체가 차밭이다. 허리 높이 정도로 바짝 깎인 차나무들이 줄을 지어 심어진 모습이 마치 능선을 따라 그어진 등고선 같다. 중간중간 차나무 꽃과 초록색 열매도 보인다. 차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본 적 있으나 열매는 처음이다. 멀리 차를 수확하는 아낙이 보인다. 웬만하면 여럿이 딸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 일을 하고 있다. 저 넓은 차밭을 혼자서 언제나 다 따나, 괜히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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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르니 구름의 언덕, 클라우드 힐(cloud hill)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과 전망대가 갖춰진 농가가 보인다. 전망대와 조경, 방갈로형 숙소로 보아 평범한 농가는 아닌 것 같고 홈스테이를 하던 곳인가 싶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올망졸망 산들이 모두 시원한 초록색, 차밭들이다. 산들이 우리나라 산과는 달리 둥글둥글 순한데, 나무 대신 야트막한 차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으니 멀리서 보면 산이 마치 풀로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


커피나무에 붉은 열매가 몇 개씩 남아있다. 이미 커피수확은 끝났으니 덜 익은 덕에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들이리라. 궁금하여 따서 입에 넣었다. 어쩌면 쓰거나 떫을 수도 있으니 앞니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런데 뜻밖에 달착지근, 먹을 만하다. 과일로 먹을 만큼 달지는 않고 대부분이 씨앗(우리가 커피로 볶아먹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단 맛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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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초순 정도의 기분 좋은 햇살 속으로 살랑이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차나무 사이 오솔길을 오른다. 완만한 언덕의 능선이고 보니 눈앞에 바로 하늘과 구름, 그리고 멀리 산들과 차밭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다리에 느껴지는 적당한 텐션과 약간 가빠지는 호흡, 그리고 나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내 마음은 자꾸만 말랑말랑 해지고 내 몸은 자꾸만 가벼워진다. 그렇게 오르다 보니 작은 전망대가 나타났다. 사방이 확 트인 언덕, 이름 모를 나무의 그늘에 기대 만든 전망대는 아무리 봐도 솜씨 좋고 섬세한 마음씨를 지닌 농부 아저씨의 작품이다. 혹시나 위험할까 봐 나무 벤치를 볼트체인으로 몇 번씩 단단하게 고정을 해 놓았다. 워낙 꼼꼼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놔서일까, 전망대 끝에 앉아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바로 밑에 차나무 밭이 있고 사다리가 달려있는 걸로 봐서 틀림없이 밭주인 아저씨의 작품이리라. 힘들게 일하다가 이곳에 앉아서 땀을 식히거나 점심을 먹는 장소로 쓰이겠다 싶다. 그러나 오늘은 한국에서 온 은퇴부부의 전용 쉼터다.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다. 언덕 정상에 전망대 끝에 앉아서 보니 내 앞은 바로 하늘이다. 마치 내가 하늘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눈 아래로는 우리가 올라온 길과 아스팔트 길, 그리고 띄엄띄엄 흩어진 집들이 마치 장난감 세상처럼 펼쳐져 있다. 눈을 들어보면 멀리 푸른 차밭으로 덮인 동그란 산들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위로는 적당하게 구름이 덮인 하늘이 산과 맞닿아 있다. 왼쪽으로는 바오록 도시가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세상을 내려다본다. 좋다. 더 이상의 행복, 더 이상의 재미는 필요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저 앉아서 멀리 산과 하늘과 집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런 시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나지막이 노래들을 불러본다. '성불사'에서 '가고파', '떠나가는 배'를 거쳐 노사연의 '돌고 돌아가는 길'까지, 모두 스무 살 때 목이 터져라 부르며 사춘기를 넘어온 나의 애창곡들이다. 이제 환갑을 넘어 은퇴백수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내 가슴은 저려온다.


산 넘어 넘어 돌고 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 발만 돌고 도네

강 건너 건너 흘러 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 몸만 흘러 흘러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먼 산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치며 왈칵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사춘기의 그 아프고도 설레던 느낌들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마치 말라 붙었던 바위솔이 장맛비에 새파랗게 살아나듯 그렇게 살아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살이에 쌓인 이런저런 슬픔과 스트레스들이 하나씩 올라와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울다가 노래 부르기를 반복하고 있으려니 아내가 묻는다.


"자긴 왜 울어?"


글쎄, 내가 왜 우는 걸까? 슬퍼서도 아니고,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뜬금없이 사춘기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냥,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하니까 눈물이 나네"


그렇게 멀고 먼 베트남의 어느 농촌, 윈드힐 언덕에 뜨거운 숨결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내가 베트남을 다시 여행한다면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과, 멋진 쉼터를 장만해 준 얼굴 모르는 농부아저씨에게 감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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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관리인 아주머니의 딸내미가 쪼르르르 달려온다. 올해 11살인데 눈망울이 맑고 미소가 예쁜 호리호리한 여자아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인사를 하고는 집안으로 쑥 들어와 앉는다. 그리고는 뭔가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자세히 보니 직접 그린 그림이다. 하나는 모눈종이에 그린 동양화이고 또 하나는 가족을 그린 듯싶다. 제법 물그림자와 음영까지 넣은 게 대견해서 아주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 주었더니 배시시 웃으며 그림 두장을 내민다. 우리 부부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맙다. 사실은 어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아이스크림을 한 통 사다 주었는데 그게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보며 표정으로 눈빛으로, 가끔은 구글로 이야기를 나눴다. 소녀는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한국으로 여행 오고 싶단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꼭 우리를 찾아오라고, 오면 잠자리와 맛있는 밥을 대접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십년 후에 예쁜 베트남 아가씨가 우리 집에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우리 부부와의 약속을 조그마한 등대 삼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베트남의 시골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 지나치는 여행자였다면 꿈도 꾸기 어려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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