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입국한 지 14일, 달랏에 머문 지 6일 만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이자 아름다운 관광지 달랏은 우리 부부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도시가 예쁘다고는 해도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관광을 다니거나 사진을 찍는 정도로는 뭔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맘껏 걸을 길이 없었다. 겨우 달랏대학교 캠퍼스를 어정거리거나 가까운 랑비엥 산을 한 번 다녀왔을 뿐이다. 게다가 집을 나선 지 2주, 여행에서 운명처럼 맞이하는 권태기도 올만한 시기였다. 권태기라니, 신나는 여행에 웬 권태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이는 한달 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나의 경험으로 보자면 장기간의 여행 중에는 반드시 이 권태기가 찾아온다. 떠날 때의 설렘도 시들해지고 낯선 여행지도 익숙해지고 무엇보다도 여행 자체가 또 다른 일상이 되어 버리는 시기, 대신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집이 그리워지고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과 사람들이 슬슬 보고 싶어지는 시기, 이게 바로 여행의 권태기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 녀석은 집을 떠난 지 대략 보름 정도면 소리 없이 나타나서 은근슬쩍 여행을 끝내라고 유혹하기 시작한다. 바로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 부부는 고민에 빠졌다. 달랏에서 바로 귀국을 해버릴까, 호치민에 들렀다가 갈까, 휴양지라는 푸꾸옥으로 갈까....., 결국 이번에는 좀 더 호젓하고 덜 알려진 소도시를 찾아보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검색을 통해 바오록이라는 도시를 알아냈고 만일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기귀국을 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달랏을 출발한 버스가 두 시간쯤 달려 바오록 부근으로 다가서는 순간부터 그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산들이 둥글둥글 순해지고 시야가 지평선을 따라 넓어지며 길은 평탄해진다. 길 가에는 진한 갈색의 곡식을 널어 말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하는 데, 이곳이 커피의 고장이니 저게 커피겠구나 싶다. 커다란 잭프룻을 파는 과일 노점상들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어쩌면 운명적인 만남을 할 것만 같은 예감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그랩을 켜니 차가 검색되지 않는다. 이게 웬 일인가 싶어서 몇번을 시도해도 주변에 차가 없다는 메세지만 거듭해서 뜬다. 알고보니 이곳 바오록에는 그랩택시가 없단다. 친절한 카페 여주인이 불러 준 택시를 타고 숙소인 sen villa에 도착했다. 일단 가파른 언덕에 3단으로 집을 짓고 금잔디와 꽃으로 아기자기 꾸민 집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언덕 아래로 펼쳐지는 푸른 초지와 과수원, 그 과수원 사이로 구불구불 오르막을 오르는 길들, 그리고 멀리 맞은편 언덕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집들이 만드는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다. 숙소에서 몇 발자국만 오르면 볼 수 있는 반대편 전망은 더욱 환상적이다. 멀리 숲과 안개 사이로 동화처럼 신비로운 도시와 집들이 나무 사이로 어우러져 있고 더 멀리로는 뾰족한 산 봉우리가 푸르스름한 안갯속에 아스라이 보인다. 도시 전체가 둥글둥글한 언덕과 저지대로 이루어져서 웬만하면 사방이 확 트이는 멋진 뷰가 나오는 곳이 바로 바오록이다. 게다가 징글징글하던 오토바이 소음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롭다. 하, 이런 절경이 다 있었다니, 남들은 달랏이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이곳이 최고의 여행지다. 첫눈에 바오록에 반해버렸다.
바오록, 달랏에서 호찌민으로 가는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며 특히 비단과 차의 재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관광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특히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은 드문 편이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바오록을 검색해 보니 아고다니 호텔스 닷컴이니 하는 사이트들에서 올려놓은 간단한 자료들과 숙소에 대한 소개만 있을 뿐, 실속 있는 정보나 후기들은 없다. 한 마디로 한국인에게 바오록은 미개척 관광지인 셈이다. 그런 바오록을 찾게 된 것은 한 여행작가의 신문기사를 검색하고 나서였다. 주로 베트남의 소도시들을 여행했다는 작가는 바오록을 '차와 커피로 향긋한 도시'로, 호젓하고 조용한 호수의 도시로 소개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차와 커피, 혹은 실크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사실은 다낭에서 호이안, 달랏으로 이어지는 도시관광이 우리 부부에게 적잖이 피로감을 주고 있었다. 애초에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사진 찍고 맛집 찾아가는 도시 투어가 체질이 아닌 우리 부부에게는 오토바이 소음과 매연에서 벗어나 전원 속에서 휴식하고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호젓하고 조용한 도시라는 말에 혹해서 선택한 곳이 바오록이다.
첫날 저녁은 가볍게 동네 산책, 다음날 아침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바오록 답사에 나선다. 먼저 도시 내에 위치한 사진 명소 바람의 언덕 (wind hill)을 찾았다. 그런데 구글 지도가 가르쳐주는 대로 가는 데도 길을 못 찾겠다. 자꾸만 길이 없는 곳으로 좌회전하라니 두세 번을 맴돌아야 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는데 바람의 언덕으로 향하는 길이 집과 집사이로 난 좁은 비포장 길이었기 때문에 이걸 미처 못 보고 두 번이나 지나쳐버린 것이다. 세 번째야 골목길을 발견하고 들어섰는데 자갈이 울퉁불퉁, 오토바이가 터덜터덜 거린다. 살금살금 내려가 보니 여기에 또 멋진 장관이 기다리고 있다. 언덕아래로는 저지대가 넓게 펼쳐지고 멀리 맞은편 언덕에는 나무와 야트막한 집들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언덕 위의 집 한 채가 있어 다가가 보니 예쁜 꽃들과 대문이 마치 선계로 통하는 입구인 것 같다. 베트남어로 무어라고 쓰여 있는데 카페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꽃이 가득 핀 오래된 집도, 그 집에서 내려다보는 아득한 전망도 아무리 봐도 신선이나 요정이 살 것 같다. 모르는 척 안으로 들어가니 인상 좋은 아저씨가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려면 아래쪽에 카페가 있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내려와 카페 2층 노천테이블에 앉았다. 핀 드립 커피는 사약처럼 쓰고, 털실뭉치를 뒤집어쓴듯한 모닝 빵은 으슬치게 달고 짠맛이었으니 조금도 불만이 없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무 생각 없이 파노라마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냥 앉아 있어도 좋다.
여행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짜릿한 모험과 놀라운 발견? 환상적인 체험과 쾌락? 물론 그런 것들이 가끔은 필요하리라. 그러나 여행을 한다 해도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이니 자극적이고 놀라운 순간은 어쩌다가 한 번 만나는 경험일 뿐, 지속될 수는 없다. 아니, 지속되어도 곤란하다. 쾌락도 스트레스의 일종으로 우리에게 굉장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처럼 시간이 멈춘듯한 고요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더 기억에 남는다. 3년 전 스페인의 론다 절벽 앞에서, 그리고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순간 느꼈던 행복감이 아직도 나에게 힘을 주는 걸 보면 순간의 체험, 순간의 행복은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 동안 우리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지도 모른다. 그 행복의 체험에 지금 이 순간 하나를 더 얹는다.
다시 길을 나섰다. 인터넷에서 찾은 커피농장을 구글맵에 입력하고 오토바이로 찾아가는 중이다. 작은 도시를 벗어나려는 순간 길가에 과일 노점상이 눈에 띈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차, 과일 킬러인 내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오토바이를 멈추고 다가가 보니 트럭 화물칸에 과일을 가득 싣고 모자가 함께 노점을 지키고 있다. 대충 살펴보니 코코넛과 커다란 자몽, 파인애플이 눈에 띈다. 아내는 붉은 속살의 청자몽을, 나는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파인애플을 골랐다. 자몽은 원래 쌉쌀한 신 맛 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은 이곳에서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붉은 과육이 입에서 톡톡 터지면서 달콤, 상큼한 과즙과 향기가 입에 가득하다. 한 개를 반으로 갈라서 아내와 먹는데 둘 다 눈가에 놀라움과 행복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이 다가오더니 이리 줘보란다. 그리고는 먹는 방법을 보여준다. 한쪽 속 껍질을 안에서 바깥쪽으로 뜯어내고 나서 이번에는 과육을 잡고 반대편 속껍질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오호, 이게 바로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구나. 마치 새끼 원숭이가 엄마 원숭이에게서 배우듯 우리 부부는 금방 가르침에 따라 자몽을 먹었다. 속 껍질을 벗겨내니 훨씬 상큼하고 촉촉한 느낌이다.
파인애플이야 한국에서도 먹어 봤으니 신기한 게 있을까 싶은데, 여기에도 차이가 있다. 먼저 파인애플 깎는 법부터 설명하자. 파인애플은 겉껍질을 벗기고 나면 가시 부분의 흔적이 점처럼 남는다. 한국에서는 이걸 무시하고그냥 먹었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사선으로 금을 그어가며 가시 자국을 도려낸다. 다 깎은 파인애플을 보면 마치 회오리 모양의 사선들이 그어져 있어서 조각 같기도 하고 케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커다란 칼로 파인애플을 세로로 몇 조각으로 나누고 가운데 딱딱한 심은 역시 칼로 툭 쳐서 잘라 내버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파인애플 심이 한국보다 부드럽고 달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과육에 붙은 심 부분을 씹어 보니 제법 달달해서 먹을 만하다. 더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서 그런가 싶다. 청자몽 한 개에 파인애플 한 개, 3,000원쯤 주고 산 과일 두 개에 부부가 배가 불룩, 다 먹지 못해 남은 파인애플은 비닐봉지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채워지고 나니 베트남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구릉과 저지대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을 오토바이로 달린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우리나라로 치면 4월 중하순의 날씨에 하늘은 조각구름 몇 개가 떠 있는 청명한 오전이다. 저지대를 지나 다시 언덕을 오른다. 한참을 달려가니 드디어 구글지도가 목적지에 도착했단다. 그런데 목적지가 차밭은 맞지만 방문객에게 체험을 제공하는 곳은 아니었다. 주인 남자가 나와서 웃음기는 띄었지만 단호하게 여긴 그런 곳 아니니 나가란다. 멀리서 차밭 사이로 뭔가를 심는 농부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숙소로 돌아왔다. 피곤하긴 하지만 그냥 누워있기에는 언덕길이 너무 궁금하다. 아내와 다시 저녁산책을 나선다. 널찍한 자갈길을 지나 한적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는다. 길 옆에 처음 보는 야트막한 나무들이 보인다. 사람키를 조금 넘을 만큼 나무들이 높지 않다. 살펴보니 나무 둥치는 제법 굵지만 가지들은 모두 올해 것들만 보인다. 사람들이 수확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해마다 묵은 가지를 잘라내고 새 가지만 키워 열매를 수확하기 때문이리라. 잎은 약간 반짝이는 키틴질로 보이는데 생김새는 밤나무 잎과 흡사하다. 이게 뭘까, 나는 눈치로 커피나무라로 찍었고 아내는 밤나무를 찍었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나무가 해답을 달고 있다. 바로 붉그스름하게 익은 커피 열매다. 이미 수확을 끝내고 아스팔트 길에서 뒹굴뒹굴 마지막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 시기인데, 이 녀석들은 부실하게 자란 덕에 수확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나 보다. 커피나무 사이로 이름 모를 들꽃 향기를 맡으며 저녁산책을 한다. 꿈만 같다. 내 인생에 커피나무 사이로 산책을 다 해본다. 멀리 서쪽 하늘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름에 반 이상 가려서 오늘은 제대로 된 일몰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성급한 판단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잠시 반대편 언덕을 내려다보다가 뒤돌아 서는 순간, 으악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 것이다. 마치 원래는 예정에 없었지만 여행자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듯한 붉은 노을 앞에,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우주와 하나 됨을 느껴본다.
이곳의 지형은 일출과 일몰, 그리고 월출과 월몰을 모두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위치가 많다. 둥그런 구릉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는 데다가 부근에 높은 건물이나 높은 나무가 없으니 사방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올망졸망 산들이 많고 빌딩과 아파트가 천지인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다소 낯선 풍경이다. 그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묘한 신비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바짝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되는 걸까,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도 든다.
숙소에 돌아와 발코니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이미 노을은 붉은색을 잃었고 점점 어두운 청회색으로 물들어간다. 마침내 청회색마저 색을 잃어 하늘과 땅의 구분이 사라지는 시간까지,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말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바라보는 곳이 하늘인지 땅인지,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구별되지 않는 절대평화속에서.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시간과 공간처럼, 바오록의 첫날밤은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