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기타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시간에 기타를 배우면서였다. 수업이라는 말 한마디에 엄마는 6,000원 이라는 큰돈을 선뜻 내고 ‘세고비아 통기타’를 사주셨다. 60명이 함께하는 음악 수업에서 제대로 실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그 덕에 방에 기타를 두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후로 공부하다가 쉬고 싶거나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 통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댔다. ‘고래사냥’이니 ‘그건 너’ 혹은 ‘나 어떡해’ 같은, 지금은 7080이라 부르는 유행가들이었다. 쉬운 코드 몇 개와 고고 리듬으로 치는 서툰 실력이었지만, 목청껏 노래를 불러대면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통기타를 2학년이 끝나가던 늦은 가을날, 보문산으로 이사 가면서 잃어버렸다. 빌린 리어카로 초라한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집어가 버린 것이다. 정작 나는 무덤덤한데 엄마가 더 서운해 했다. 그동안 내가 노래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셨나보다.
다시 기타를 만난 것은 그 후로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생명평화결사라는 단체의 여름 수련회에서였다. 저녁을 먹고나서 조별 토론을 했는데 마침 조원 한 사람이 통기타 가수였다. 그 분의 제안으로 토론 대신 주방 한 편에 둘러앉아 7080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처럼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의 노래나 연주를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나도 기타를 배우리라. 청주에 돌아오자마자 학원에 등록하고 클래식기타를 마련했다. 그러나 처음 의욕과는 달리 직장 일에 매이고 끈기마저 부족하고 보니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두세 번 학원을 드나들었을 뿐이다.
세 번째 만남은 정년퇴직 후, 보은 문화원의 기타반에 등록하면서였다. 일 년에 9만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용에 얼씨구나 등록하고는 수강생이 되었다. 거기에서 ‘소리사랑’이라는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작은 무대에 서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피곤한 몸으로 밤늦도록 연습하는 정열을 불태우면서 말이다.
삼세번이라는데, 이번 만남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생각이다. 바쁠 것 없는 은퇴인생에 이만큼 재미있는 취미생활이 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야심찬 꿈도 있다. 외국 여행을 겸한 길거리 공연, 이른바 버스킹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소망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3년 전, 아내와 둘이 스페인의 세비야라는 도시를 여행하면서 ‘스페인 광장’ 이란 데를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 한적한 건물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발길을 옮겨보니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한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창을 하고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애절한 멜로디로 보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잘못 선택한 인생을 후회하는 노래일 것 같았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야 막 동양인 부부가 나타났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노래에만 푹 빠진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순간 하나의 깨달음이 불쑥 떠올랐다. 그래, 노래를 뭐 인정받거나 돈 벌려고만 하나, 가슴에 쌓인 그리움과 절망과 사랑을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이 노래지. 나도 외롭고, 그립고, 사랑한다고 세상에게 말을 거는 것. 그것이 노래아닌가. 그렇다면 나라고 못할 이유가 뭔가,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은데.......,
연습을 핑계 삼아 집에서도 자주 기타를 꺼내들고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흘러내리는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고음불가로 질러대는 내 노래가 가족들은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잘 참아주니 고맙다. 아니, 가끔씩은 콧노래로 흥얼거리거나 한 소절씩 따라 불러주는 게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노래하는 순간 나는 ‘고래사냥’을 떠나고픈 스무 살 청년이고, 외딴 파도 위 조그만 섬마을에 사는 ‘섬 소년’이며, 뒷동산에 올라 엄마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는 이등병이 된다.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다행히 시간은 많다. 적어도 10년간은 연습하고 실력을 쌓아서 해외공연을 나설 참이다. 듣는 이 없어도, 돈을 던지지 않아도, 혹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꿈을 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나이에 과분한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