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인어른의 서거 1주기를 맞아 시사회를 열었다. 간단히 추도예배를 마치고 스무 명 남짓의 자손들이 둘러 앉아 두 분의 영상자서전을 시청한 것이다. 자서전은 방송국에서 일한 적 있는 필자가 2009년부터 조금씩 촬영해 놓은 것을 모아서 최근에 완성했다. 일단 돌아가신 분이 젊은 목소리와 모습으로 나타난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반갑다. 뒤이어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으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막막하고 고생스럽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각자 기억하는 아버지, 장인어른, 할아버지가 아니라 먼저 살고 간 한 인간의 진솔하고 담백한 삶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보다 실감 있고 감동적이다. 글로 담기 어려운 영상의 힘이다.
필자가 영상자서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방송국 PD로 근무하던 15-6년 전이었다. 최근에는 이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영상자서전이라는 말조차 흔하지 않았다. 나는 일인제작에 관심이 있어서 손수 캠코더를 들고 촬영을 했는데, 그 장르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였다. 알다시피 휴먼 다큐멘터리는 삶의 이야기와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는 것이 생명이다. 그런데 제작을 하면서 유식하고 출세한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꾸밈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득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하면 보통사람도 자서전을 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로 쓰는 자서전이야 상당한 필력이 있거나 대필작가라도 구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야 가능하지만, 말로 하는 거야 아무나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거기에 글로는 담을 수 없는 이미지와 목소리까지 기록할 수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요즘은 스마트 폰이 생겨서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다. 특별한 장비나 기술도 필요 없고 마음만 내면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을 찍고 간단하게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영상자서전을 만들어 보길 권한다. 영상자서전이라고 하니까 뭔가 엄청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쉽다. 우선은 자신의 삶을 구술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물론 몇 가지 요령은 있다. 우선 장소는 좀 편안하고 익숙한 장소, 이를테면 안방이나 거실, 식탁 등이 좋겠다. 과거를 떠 올리려면 오래된 앨범을 펼쳐 놓는 것도 방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대별로 나누어서, 가까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혹은 행복했던 순간이나 후회되는 일 등 주제별로 구술하는 것도 좋다. 하루에 끝내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장소를 바꿔가며 기록하면 훨씬 더 다채롭고 재미있어 진다.
이렇게 지나온 삶을 구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상자서전은 만들어 진 것이나 진배없다. 여기에 옛날 사진들을 모아 촬영하면 훨씬 재미있다. 과거와 관련된 서류(호적, 상장, 성적표 등등)나 오래전에 쓰던 물건이 있다면 이것도 훌륭한 촬영거리다. 더 욕심을 내자면 현재 자신이 사는 모습, 일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혹은 집에서 먹고 쉬는 모습을 촬영하면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모은 영상들을 약간의 연습을 거쳐서 스마트 폰으로 편집하면 자신의 인생이 압축된 감동적인 휴먼 다큐멘터리가 완성될 것이다.
잠깐, 그런데 영상자서전은 누구를 위해서 만드는 걸까?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맞다. 그러나 가장 먼저 즐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만드는 과정이 바로 놀이이며 치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한 장 한 장 정리하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살아갈 힘도 생긴다. 얽혀 있는 문제가 단순해지기도 하고,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한 조연이 아니라 주연배우임을, 실패인 것 같던 내 인생이 나름 화려했음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자서전을 죽기 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시작해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