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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로드 에세이

by 심웅섭

23. 재회.

레온 11월 10일



아내를 기다리며 그야말로 빈둥빈둥 하루를 지내고, 드디어 재회의 날이다. 아내와 주고받은 카톡에 의하면 점심시간쯤 레온에 들어온단다. 이층 숙소의 발코니에서 길을 내려다보며 아내를 기다린다. 알베르게의 간판이 워낙 작아서 아내가 찾기는 어렵고, 어차피 순례길이 숙소 앞을 지나니 내려다보고 내가 찾는 게 빠를 것이다. 레온 성당과 광장의 중간쯤 되는 골목으로 관광객과 순례자와 주민들이 모두 모여드는, 한국으로 치자면 명동쯤 되는 곳이다. 오래된 골목에 빼곡한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야말로 2층에서 본 거리다.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듯

세상은 평화롭게 갈 길을 가고

분주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온종일 구경하는 아이도 있고

시간이 숨을 쉬는 그 길가에는 낯선 그리움이 나를 감싸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의 노래와는 달리 레온의 알베르게 2층에서 본 거리는 활기와 설렘이 가득하다.


드디어 판초우의를 걸친 아내가 도착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내가 나에게 짜증을 낸다. 숙소를 옮겨야 하는데 체크인이 오후 3시라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며 걸은 아내는 피곤하기도 하고 샤워도 하고 싶은데 카페에서 기다리려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나는 나대로 할 말이 있다. 사실은 어제 머문 숙소에서 순례자들이 밤새워 술을 먹고 노래를 해대는 통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순례자들은 오늘 아침에 떠났지만 혹시라도 오늘 밤에 또 그럴지도 모른다는 마음에서, 아내를 편히 모시려고 숙소를 옮기기로 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자기가 편하게 쉬게 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도 아내의 짜증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는다. 기도 죽고 서운하기도 하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까미노를 걸으며 아내가 말을 꺼냈다. 사실은 혼자 걷는 이틀 동안, 너무나 외롭고 재미없고 의미 없었노라고. 마침 순례자들도 뜸하고 중간에 길까지 헛갈리면서 빗속에 걸었노라고. 그 순간 아내의 짜증이 모두 이해가 됐다. 아내의 짜증은 나를 만나서 반가움과 그동안의 외로움이 갑자기 만나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부조화, 비유하자면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수증기가 만나서 요동을 치는 것이었구나. 나에게 짜증을 부린 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로구나. 어쩌면 아내는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순간 가슴속에 뜨거움이 울컥 치솟는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다시는 따로 떨어지지 말자. 끝까지 같이 걷자”



11월 11일 레온-오스삐딸 델 오르비고


부르고스를 지나면서 순례길이 달라졌다. 오래된 마을 대신 도시지역을,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는 까미노가 아니라 고속도로를 만나고 찻길을 따라 걷는 구간이 많아졌다. 오늘도 국도를 따라 끊임없이 걷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나가는 차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틀 동안 쉬었으니 발목도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고 무엇보다 아내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다시 걸을 용기가 솟아났다. 문제는 길이 정말 단조롭다는 것.


재미거리를 찾았다. 찻길과 순례길이 바로 붙어서 가는데 찻길에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가 1km 간격으로 쓰여 있다. 1km를 걸으려면 몇 걸음을 걸어야 할까, 다시 말해서 내 보폭은 얼마나 될까? 늘 궁금했는데 오늘 아주 제대로 만났다. 숫자가 쓰여 있는 지점부터 내 발걸음을 세기 시작한다. 한나아아, 두우우울, 세에에엣, 네에에엣, 네 걸음이 하나이다. 많은 숫자를 세기 위해서는 네 번씩 잘라서 한 묶음으로 세는 게 좋다. 두 개, 혹은 세 개나 다섯 개를 한 묶음으로 세는 것은 불편하고 헛갈린다. 괜히 ‘네 박자 쿵짝’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몇 번을 발걸음을 세어보니 오차 없이 347이다. 넷이 한 묶음이니까 발걸음 수는 347 * 4= 1,388이고 따라서 내 보폭은 72cm라는 얘기다. 허, 제법인데.


나는 내 보폭이 대충 60cm라고 알고 있었다. 재어 본 것은 아니고 어디선가 그렇게 들었나 보다. 키가 작고 다리도 짧으니 어쩌면 60cm도 안될 듯도 싶었다. 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았다. 내가 생각보다 롱다리라는 걸 말이다. 아내는 내 발목이 걱정되는지 중간중간 눈치를 살피는 기색인데 정작 나는 발걸음 세는 재미에 아픈 것도 잊고 걷는다.



잠시 카페에 들렀더니 할머니 세 명이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이도 들고 비에 젖어 걷는 길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치 소녀들이 깔깔거리는 것 같다. 인사를 했더니 할머니 한 분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갑자기 오늘 도착할 지명이 생각나지 않는다. 머뭇거리다가 엉뚱한 말을 해 버렸다.


“몰라요, 아내가 정하면 난 그냥 걸어요”



할머니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한다. “아이고, 남자들이란 그저 똑같아”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별것도 아닌 대답이 너무나 기분 좋은 정답이었나, 아니면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할매라서 일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릴적 친구들이 함께 순례를 하나보다. 그 표정들이 마치 여고생들의 생기 넘치고 웃음기 가득한 모습이다. 부럽다. 나도 저 나이에 어릴적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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