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에 도착, 숙소를 잡고는 씨티버스를 타고 시내를 둘러봤다. 좁고 오래된 주택가도 지나고, 로마시대에 세웠다는 성벽도 지난다. 씨티버스에서 내려서는 숙소에서 가까운 레온 성당도 들렀다. 기둥의 높이가 20m는 넘을 듯, 모두 아치구조로 지어져있다. 잠시 순례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아무래도 신이 안 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에 돌아왔다.
내가 배정받은 베드는 침대 6개가 들어있는 방이다. 아침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나 혼자였는데. 저녁 무렵에 주인이 웬 아가씨를 한 명 데리고 들어온다. 대충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아가씨, 인사를 나눠보니 프랑스인이란다. 아무리 남녀 가리지 않는 게스트하우스라고는 해도 한 방에 젊은 아가씨와 단 둘이 머물자니 조심스럽다. 그런데 정작 그 아가씨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무심하다. 서먹함을 없애려고 몇 가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보기와는 다른 놀라운 사실, 그 아가씨가 프랑스의 순례길을 이미 거쳐서 스페인으로 넘어왔으며 프랑스에서만 걸은 거리가 700km쯤 된단다. 모두 1,500 km를 걷는다는 뜻이다. 헉, 난 800km도 대단하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1,500km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한 달쯤 걸었단다. 하루에 40km정도를 걷는다니 날씬하고 자그마한 아가씨가 놀랍기만 하다.
며칠 후, 이번에는 2000km 순례자를 만났다. 모두들 배낭에 등짐을 지고 가는데 반해 이 아저씨는 작은 손수레에 짐을 싣고 허리에 끈을 매어 끌고 걷는다.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손수레에 대해서 물었더니 자기는 스웨덴 사람이며 이 수레를 끌고 2000km가 넘는 거리를 석달 째 걷고 있단다. 하기야 순례 초반에 만난 독일 친구는 5년째 세계 여기저기 순례길을 찾아다니며 걷고 있다니 어쩌면 순례를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싶다.
이 독일 친구에게 한국에도 걷기 길이 많고 아름다우니 와 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이 친구 반응이 의외다. 일본의 걷기길이 유명해서 가 볼 계획인데 한국은 잘 모르겠단다. 억울하다. 한국에도 제주도와 지리산을 비롯해서 각 지자체에서 특색 있게 개발한 둘레길이 수백 개는 될 텐데, 그리고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멋진 길들인데 그걸 모르다니. 짧은 영어로나마 길들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일본에 올 때 기회가 되면 한국을 들러보겠단다. 내 얼굴 봐서 빈 말로 그러는 지도 모르겠고, 재고떨이 처럼 억지로 권유하는 모양이 돼 버린 것 같아서 입을 닫고 말았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리나라 둘레길은 왜 유명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도 먼저 궁금한 게 있다. 우리나라에는 왜 그렇게 둘레길이 많은가? 내 기억이 맞다면 한국에서 걷기 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제주 올레길이다. 2007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서명숙씨의 제안과 많은 사람들의 호응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후 바닷가, 강가, 산, 마을길 할 것 없이 걷기길과 자전거길이 만들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았다. 통계를 살펴보니 2019년 둘레길을 이용한 사람들은 1,6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단다. 둘레길의 갯수와 총 길이에 관해서는 통계를 잡아내지 못했지만 각 지자체별로 한 두개의 둘레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5-6백개의 둘레길이 개발돼 있으리라. 한마디로 짧은 기간에 열풍처럼 번져나간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유 같은 건 없다. 좋아하는 일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좋아한다. 굳이 해석을 해 보자면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말이나 수레, 혹은 배 보다는 두 다리에 의존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예로부터 한국은 길이 좁았다. 한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대로를 걸어보면 이름과 맞지 않게 오솔길이라는 게 놀랍다. 수레는 아예 다닐 수가 없고 걷거나 고작해야 말 한필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 이웃마을로 가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서도 주로 두 다리로 걸었다는 뜻이리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길을 넓히는 걸 아예 포기했다니 지금으로 봐서는 좀 황당한 얘기지만 어쨌든 대부분 걸어야했다. 몽골의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말을 탄다거나 베트남의 수상가옥 아이들이 아이 때부터 노를 젓는 것처럼, 우리는 평생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산업화가 되고 자동차가 늘면서 사람들이 걷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 대충 50여년, 유전인자에 각인된 정보를 지우기에는 턱도 없이 짧은 시간이다. 오히려 그동안 편리함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린 걷기 본능이 폭발하듯이 튀어져 나온 현상, 이게 바로 걷기길 열풍이 아닌가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외국 순례자나 스페인 사람들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가끔 받는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스페인으로 순례를 많이 오냐고. 2019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은 한국인은 대략 6,500여명, 인근 유럽국가를 제외하고는 단연 최고다. 크지도 가깝지도 않은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오는지, 그들에게는 참 궁금한 일이겠다 싶다.
이런 질문들을 받은 한국 사람들의 대답은 몇 가지로 나뉜다. 모 방송사에서 '스페인 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이 영향이라는 해석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TV에서 방송한 예능 프로그램이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사람들에게 내재된 걷기 본능을 일깨운 것이지 새롭게 창조한 건 아니라는 것, 또 뒤집어서 보면 그런 프로그램이 생긴 것이 바로 걷기, 혹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라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예능프로그램에서 방송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관찰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오히려 역사와 유전인자를 들먹이는 게 다소 비과학적으로 보일지언정 더 설득력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걷기를 좋아하고 전국에 걷기길이 부지기수인데도 외국 사람들이 걷기위해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잘 알려지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부러운 점, 우리나라 걷기길에는 없거나 부족한 것들은 짚어 볼 수 있을 듯싶다.
우선 부러운 것은 역사 유적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앞서도 말했지만 5-600년 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오래된 집들, 성당들, 다리들이 많다. 이 점은 뭐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하루 아침에 한국에 역사유적을 늘릴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대신 역사유적들과 멋진 자연과 문화자원들을 잘 엮어내는 일은 해 볼만 하겠다싶다. 없는 유적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있는 유적들조차 걷기길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실 기술적인 문제 이전에 기획의 문제라고 본다. 우리에게는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단순히 편안하고 안전한 운동을 목표로 걷는다는 기본 전제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걷기는 사실 안전한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걷기는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연출되지 않은 삶을 체험하는 기회 등 지극히 복합적이고 감상적인 소비행태이다.
카톨릭 순례처럼 불교의 깨달음을 기본 테마로 설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눈에는 불교와 절이 익숙한 것이겠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인 요소일 것이다. 오래된 절들을 거점으로 불교 루트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유형, 무형의 전통문화재와 오래된 마을, 아름다운 자연 들을 배치하여 잇는 것이 어떤가 싶다. 조계종의 협조를 얻어서 큰 절마다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저렴한 비용에 불교식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을에는 인근 식당이나 희망하는 민가에서 순례자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건 어떨까? 마을회관이나 민박집 등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길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고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유저들을 겨냥한 앱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나의 단체에서 전국의 걷기 길들을 몇 개의 코스로 엮고, 순례자 여권을 만들어 완주하는 사람에게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기념품이나 할인권을 준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 스마트폰 앱으로 코스를 검색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숙소를 예약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길을 잘 가꾸는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스페인에 오래된 마을과 성당이 있다면 한국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불교문화가 있고 IT기반이 잘 발달되어있다. 그리고 이미 경쟁적으로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걷기 길들이 있다. 여기에 약간의 기획만 더해서 꿰기만 하면 보석목걸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