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 소모사(Somoza)
“여보, 자기는 여기서 버스 타고 먼저 가,
내가 네 시간 후면 도착할 테니까 아스또르가에서 만나서 밥 먹자”
내 몸이 으스러져도 순례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내와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다,
강철 같은 사나이의 결심이 이 한마디에 맥없이 무너졌다.
'하기야 아픈 다리로 끝까지 걷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지,
그러다가 발목을 아예 못쓰게 될 수도 있거든.
더구나 아내가 나를 생각해서 하는 제안인데,
끝까지 사양하면 예의가 아니지.
사실 몇 시간 후면 만날 거니까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정리가 끝났다.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인다.
로컬 버스를 타고 간다. 하루 종일 걸을 거리가 버스로는 고작 20분이다. 먼저 출발한 아내가 차창 밖으로 보일까 싶어서 내다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잠시 동안 작은 언덕 너머로 순례길이 사라졌는데 아마 그곳을 지나고 있나 보다. 뭐 상관없다. 몇 시간 후면 만나서 점심을 먹을 테니까.
강력한 마법에 끌려 결혼을 했지만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금세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침이면 아내가 제대로 차린 밥상을 받고, 깨끗하게 정리된 집으로 퇴근하면 또 잘 차려진 저녁밥상이 준비되어 있고, 항상 나를 바라보고 나와 대화하는 아내를 나는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중풍에 걸린 엄마를 돌보고, 딸과 아들을 낳아 기르고, 부천으로 안양으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면서 세월이 흘렀지만 아내는 항상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당연한 존재, 아내였다. 특별히 고마워하거나 배려할 이유가 없었다.
결혼 12-3년 차였을까, 작지만 큰 사건이 일어났다.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어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내가 받지 않는다. 몇 번을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음으로 놓고 잊었단다. 겨우 통화가 돼서는 온갖 신경질을 다 부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휴대폰을 발아래 내던지고는 삽으로 찍어버린다. 이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막말을 하느냐, 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순간 갑자기 눈이 환해졌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놀라운 것도 아니고, 아주 차분한 상태에서 뭔가가 깨지고 있었다. 아내는 내 아내일 뿐 아니라 그냥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걸 깨달았다는 게 부끄럽지만, 그 당시로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슬금슬금아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아내는 나에게 없는 장점들이 많다. 음식을 맛있게 한다거나 살림을 알뜰하게 산다거나 하는 기술적인 것들은 그렇다 치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에서도 말이다. 나는 앞 뒤 재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는 뒷감당을 못하는 스타일인데 아내는 차분히 궁리해보고 어떡하든 해결책을 찾아낸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않지만 인생의 큰 방향을 정할 때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을 은근슬쩍 제시한다. 물론 듣자마자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돈을 쓰는 일도 그렇다. 나는 조카들 용돈을 주거나 꼭 써야 할 곳에도 쓸 줄 모르는 좁쌀영감인데 반해 아내는 필요한 곳에는 쓸 줄 안다. 하나 둘 상의하는 일이 많아졌다.
집안일 뿐 아니라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크고 작은 부딪힘도 꺼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힘든 얘기를 아내에게 꺼내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데 조금씩 꺼내놓기 시작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일단 내가 폼을 잡을 이유가 없다. 강한 척, 아는 척,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다.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다. 어리광을 피우고 싶으면 피우면 된다.
그러나 아내와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도 명상과 관계가 깊다. 마흔 살쯤 될 무렵 나는 갑자기 명상과 기공에 관심을 갖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재미를 들이면서 아내에게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개신교 신자인 아내는 일단 거부감을 표했고 우리는 한동안 신이니 우주니 엄청난 단어들을 써 가면서 새벽까지 종교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타협점을 찾았는데 나는 교회를 다니고, 아내는 명상을 배우기로 했다. 그렇게 반은 떠밀려서 명상을 시작한 아내는 짧은 기간에 높은 단계로 훅 뛰어넘었다. 다른 예체능도 그렇지만 명상도 타고난 재능, 달란트, 혹은 출발선이 다르다. 가르치던 스승님은 이걸 보고 전생에 공부가 이미 돼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나와는 급이 다르다. 어느새 아내는 내 도반이며 동시에 철없는 남동생을 보호하는 누나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그런 아내의 배려(?)로 편하게 버스로 도착한 도시, 아스또르가는 제법 규모가 있는 중소도시다. 순례길을 따라 오래된 성당과 마을들이 이어져 있고, 전통시장과 현대적인 상가들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이 시장을 가득 채우고, 적당한 장터의 소음들이 기분 좋게 들린다. 아내와 다시 만나서 빠에야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장터를 둘러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스페인이 외국 같지 않다.
비가 오면 까미노는 종종 이런 모양이 된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내와 같이 걷는다. 목적지인 소모사까지 두 시간이면 들어갈 수 있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는 주로 도시와 도로 주변을 걸었는데 이제 다시 시골길을 걷는다. 어느새 찻길은 사라지고 시골길과 정겨운 돌집들 사이로 난 마을길이 펼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째 은근히 고도를 올리는 중이니 사실은 산골 마을로 향한다는 뜻이다. 이 지역은 포도 농사보다는 소를 주로 키우나 보다. 길을 걷다 보면 비에 반쯤 풀어진 소똥들이 많이 보이고 마을을 지날 때면 소똥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는다. 아내는 냄새에 불평을 하지만 나는 사실 별 불만이 없다. 어렸을 때, 과수원에서 돼지 닭 개와 함께 소를 키워봤기 때문이다. 사실 소똥 냄새는 다른 똥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발목의 통증이 어느 순간인가 사라졌다. 발목을 다친 후 열흘이나 지났으니 이제 그만 나을 때도 됐겠지. 그런데 시골길로 접어들면서 통증이 사라지니 이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나의 순례는 도시가 시작되는 부르고스에서부터 꼬여버렸다. 인종차별로 의심되는 불친절에 기분 상하고, 무리하게 걷다가 발목을 상하고, 도로 옆을 따라 걷느라 마음 상했다. 이제 도시를 벗어나려하자 내 발목도 멀쩡해진 것이다.
소모사는 보통 순례자들이 지나쳐가는 작은 시골 동네다. 마트도 없고 알베르게 두 개가 겨우 열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손님이 우리 둘뿐이다. 홀아비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달랑 두 사람을 위해서 난로를 피우고 식사를 준비한다. 토속음식이라는 국수를 시켰는데 국수도 수제비도 아닌 것이 마치 올챙이국수 같다. 그러나 음식 타박을 할 계제가 아니다. 둘이 먹고 자고 해도 기껏해야 80유로, 그걸 위해서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까지 해 주는 수고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