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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Oct 17. 2024

혹시, 사진 작가세요?

 나의 아침 시간이 빛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 것이다. 해가 뜨기 전,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이웃 마을로 향한다. 가까운 마을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멀면 자동차를 이용한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황금들판 사이로 페달을 밟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즐거움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적당한 곳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카메라를 꺼내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오래된 집, 구불구불한 골목, 반쯤 무너진 돌담과 그 위에 핀 나팔꽃, 컹컹 짖어대는 누렁이......, 모든 게 소중한 피사체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은 낡은 집이 최우선이다. 검게 변한 나무 기둥과 서까래, 군데군데 패이고 갈라진 흙벽, 반쯤 열린 한지 문, 어쩌다 남아있는 장독대의 항아리와 때로는 아이들이 타고 놀았을 자동차까지, 하나하나 정겹고 사랑스럽다. 이 집에 살던 소박한 이들의 숨결과 손길이, 그리고 잊었던 나의 유년 시절이 솔솔 살아난다. 

 


 사진을 찍으면서 늘 감동한다. 대한민국 어디에 이런 보물이 있을까, 옛날 농촌 마을의 모습이 민속촌이 아니라 삶터에 남아있다니, 그래서 내가 그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급해진다. 대부분의 헌 집들이 낡고 기울어서 곧 사라질 것 같아서다. 당연히 시골에 새집이 많아지는 건 환영할 일이다. 다만 사라지기 전에 얼른 옛날 모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급한 것이다. 

 사진을 찍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을 분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부터 낯선 이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그리 탐탁지 않으련만, 대부분 너그럽게 받아주신다. 말문이 트이면 자신의 인생사를 한 보따리 풀어놓기도 하고 사양하는 나에게 달콤한 믹스커피를 기어이 대접하는 분도 있다. 외부인이 드문 시골 마을에 웬 낯선 젊은이가 들어와 관심을 보이니 아예 말벗으로 삼고 심으신 게다. 이럴 땐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분의 인생사를 듣는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고생하며 아이들 키운 얘기, 30여 년 배를 타다가 뒤늦게 산골에 자리 잡은 얘기, 도시에서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중년...... 모두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이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만 해도 바로 이 시대의 기록이요 대하소설이 되겠구나 싶다.


 그런데,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내 마음속에 지도가 넓어지는 느낌, 주변 세상이 더 환해지는 느낌 말이다. 이건 도대체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마을들을 차로 지나가거나 기껏해야 휙 둘러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속의 이웃 마을은 기껏해야 안개 속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존재였다. 내 발로 돌아다니며 마을과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사진 찍는 순간, 그제야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 존재로 조금씩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선택과 약간의 후보정을 거쳐 유튜브에 올리고 카페 TV 화면에 띄워놓는다. 그런데 카페를 찾는 이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우선 TV 화면에 내가 사는 마을과 집이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 지나치면서는 몰랐는데 사진으로 보니 너무 정겹고 예쁘단다. 사진을 보며 우리 마을이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는 말이다. 우리 집은 왜 빠졌냐고, 다음엔 꼭 찍어달라고 부탁도 한다. 이분들이 간혹 던지는 질문이 있다. "혹시 사진작가세요?" 나는 당황하며 작가가 아니고 배우는 중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그러나 마을 사진에 마음을 뺏긴 분들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다. "아니 뭐, 작가가 별건가. 사진 찍으면 작가지" 이 정도면 더 따질 것 없이 마을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주변 마을들을 찍기 시작한 건 석 달 전, 내가 사는 눌곡리에서 출발했는데, 어느새 회인 마을들을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렇다고 나의 새로운 즐거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다시 한번 돌면서 새로운 가을, 겨울 모습을 찍으면 된다. 1년 후에는 어쩔 것인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마을을 걷고 이웃을 만나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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