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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Dec 08. 2024

우리동네 옛날이야기

미디어창작소에서 일하는 아들이 촬영을 부탁했다. 동네 역사에 대해 이장님 부부와 인터뷰하는데 그 모습을 찍어 달란다. 그렇게 부자가 동행 취재를 하면서 미처 몰랐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나 들을 수 있었다. 


 50여 년 전, 눌곡리에는 1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한집당 대략 5-6명은 되었으니, 1,000명 가까이 좁은 골짜기에서 그야말로 옹기종기 붙어서 산 것이다. 박씨 집성촌으로 모두 친척 사이였고 그만큼 단결이 잘 됐는데, 덕분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마을 앞을 흐르는 회인천 부근에 황무지가 있었는데, 이걸 주민들이 힘을 모아 논으로 만든 것이다. 중장비는커녕 경운기도 없던 시절, 순전히 삽과 지게질로 흙을 퍼다 개간을 했다는데 그 평수가 무려 4,000평이 넘으니 놀라운 일이다. 마을에 갈등이 생기면 동네 어르신이 나서서 조정했고, 심지어 규율을 담당하는 분도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 보다가 복장이나 행실이 불량한 여인이나 남정네가 있으면 불러다 훈계를 했다니, 일종의 자체적인 사정과 사법 기능이 작동했다는 말이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회관이 있었다. 바로 지금 카페가 자리한 곳이다. 동네에서 제일 넓어서 낮에는 마을회관으로, 밤에는 야학으로 쓰였다. 높은 종탑에는 커다란 종이 달려 있었는데, 이게 마을의 비상 연락망이었다. 종을 치는 횟수에 따라서 의미가 달랐는데 불이 나면 땡땡땡땡 급하게 연달아 쳤고 사람들은 물동이와 양동이를 이거나 들고 달려 나왔다. 요즘으로 치면 자체적인 의용소방대인 셈이다. 회관 앞 넓은 마당은 아이들 세상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남자아이들은 풀이나 나무를 한 짐 해 놓고는 모여서 가이생이나 자치기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동생을 업고 나와 고무줄놀이를 했다.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호출이 있을 때까지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의 한 가운데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재잘거림이 온 동네에 골고루 생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마치 심장이 온몸에 따뜻한 피를 골고루 보내주듯이. 아침이면 아이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학년별로 줄을 맞춰 학교엘 걸어갔다. 학생 수가 200명이 넘었다니, 그 행렬만 해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중간 촬영을 하면서 재미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미루던 이장님 부부가 서로 앞다투어 이야기를 보태거나 이어가며 가끔은 기억의 차이로 티격태격하는 것이다. 그만큼 옛날이야기에 몰입했다는 말이다. 나와 아들도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처럼 푹 빠져들었다. 마침 마을에 살다가 떠난 부부도 와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분들의 기억까지 보태지면서 인터뷰는 신나는 이야기 잔치가 되고 말았다. 만일 정치나 다른 현실 얘기라면 의견 차이로 마음을 상할 수도 있을 텐데, 옛날이야기는 서로의 아름다운 추억을 보태고 모아서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우리 마을의 옛날이야기가 TV나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 모든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동질감을 키워준다는 것 말이다.


 마을마다 비슷하지만 다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들이 기록되고 모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의 기억은 모여서 집단의 기억이 되고, 기록을 통해서 역사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의 역사는 우리의 동질감을 만들 뿐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원재료가 된다. 다양하게 섞이고 변형되어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한국문화상품으로 소비될 수도 있다. 신데렐라니 포카혼타스니 뮬란이니 하는 익숙한 캐릭터도 결국은 지역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컨텐츠다. 우리의 마을 이야기가 그보다 못할 것이 없다. 

 다행히 보은의 마을 이야기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신활력센터에 아카이브관이 생기면 이야기는 그곳에 보관되고 사람들에게 공유될 것이다. 이제는 콘텐츠가 경쟁력인 시대다. 보은이 ‘대추’에 이어 ‘이야기’의 고장으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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