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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끝, 드디어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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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28. 순례의 끝, 드디어 산티아고


빨라스 데 레이 (Palace de Rei) – 루가 프라가 알타, 11월 20일



이제 날씨는 완전한 우기에 접어들었나 보다. 일기예보를 보니 산티아고에 도착할 22일까지 거의 매일 비가 잡혀있다. 한 달 전, 순례를 시작할 때도 비가 왔다. 그래도 며칠씩은 맑은 날도 있었고 비가 오더라도 중간에 해가 나오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사리아부터는 비도 자주 오고 양도 많아졌다.



한국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씨가, 아니 야외 활동하기 제일 불편한 날씨가 바로 비 오는 날이다. 추우면 따뜻하게 입으면 되고 눈이 오면 아이젠에 스패치면 해결된다. 더우면 숲이 무성한 산이나 계곡코스를 잡으면 문제없다. 그런데 비 오는 날은 답이 없다. 무엇보다도 경치와 시야가 별로인 데다가 앉아서 쉬거나 무얼 먹기도 불편하다. 배낭과 옷과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이러니 갑자기 오는 비를 대비해서 우장을 갖추기는 하지만 웬만하면 비 오는 날은 야외활동을 피한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비 오는 날에 대한 두려움, 금기가 사라졌다. 워낙 며칠씩 비가 오는 데다가 막상 걷지 않으면 할 일도 없다. 처음에는 축축한 판초우의를 입고 걷는 것이 불편하고 꿉꿉했는데 걸어보니 또 별것도 아니다. 대신 배낭 속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두세 개 넣고 여기에 비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을 분리해서 보관한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면 우선 신발을 따뜻한 곳에서 잘 말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정도 요령만 있으면 사실 비 오는 날이라고 걷는데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다.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70km쯤, 3일이면 순례가 마무리된다. 약간의 홀가분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함께 느껴진다.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오늘 예약한 숙소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실은 간판을 보기도 전에 마당을 서성이는 아줌마를 보고 먼저 알았다. 어제 예약을 하면서 도착시간을 묻기에 3시 반쯤이라고 말했더니 그 시간 즈음에 마당에 나와 있겠단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싶은데 말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가 보니 깔끔한 이층 집 전체가 우리 숙소다. 물론 방이 몇 개 있는데 순례자가 우리 부부뿐이라는 말이다. 35유로를 벌자고 청소해놓고 불 피워놓고 일부러 나와서 기다리고, 노고를 생각하니 고맙기만 하다. 한 달쯤 지내고 보니 이젠 스페인 아줌마가 외국 아줌마 같지 않고 한국의 시골 아줌마 같다. 방이 너무 마음에 든다, 깨끗하고 따뜻한 방을 비싸지도 않게 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인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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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미안한 일이 있다. 워낙 작은 동네라서 식당을 겸한 바가 달랑 한 개 있는데 여기에 6시 예약을 해두었단다. 가보니 아무도 없고 우리 부부뿐이다. 시골의 작은 바라도 웬만하면 주민들이 앉아서 술도 한잔하고 수다도 떨고 하는데 여기는 달랑 우리 둘이 전부다. 그 둘을 위해 노처녀로 보이는 주인 여자는 열심히 요리를 준비한다. 샐러드와 돼지고기 스테이크, 와인이 코스로 나왔다. 제법 정갈하고 먹을 만하다.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짧은 스페인어 단어를 던졌다.

“무이 뽀꼬 페레그리노스?”


어법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순례자 너무 적지?’ 이런 의미다. 이 말 한마디에 아가씨의 말문이 터졌다. 너무 적다, 여름에는 무척 많았는데, 요즘은 몇 명 안 된다......, 긴 설명에 이어 이 지방의 특산품 치즈와 토속주라면서 술도 한 잔 권한다. 마셔보니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인 듯, 후끈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와인 한 잔이면 이미 한계에 다다른 주량 이건만, 주인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독주 한잔을 다 마셨다. 정해진 돈을 내고 음식과 숙소를 사긴 했는데, 아무래도 큰 신세를 지는 것만 같다.


루가 프라가 알타 – 뻬드로우소, 11월 21일



오늘이 순례 34일 차, 내일이면 순례가 끝난다. 참 오래 걸었다. 첫날 나폴레옹 루트를 따라 피레네를 넘던 장면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 후로 얼마나 많은 발자국과 숨결들을 이 스페인 땅, 산티아고 순례길에 남겼을까?



여행을 할 때 나타나는 나의 버릇이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낯선 곳에 대한 설렘과 흥분으로 행복해하고, 여행의 중간에는 집을 그리워하다가 끝날 즈음에는 여행지를 그리워한다. 여행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면서 지금 머물고 있는 여행지가 떠나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순례를 채 마치기도 전인데 마치 순례를 마치고 몇 년 후에 이 순간을 그리워하듯, 이 땅과 사람들과 걷는 순간순간의 느낌과 내 숨결들까지도 가슴 저리게 소중하다.



오늘도 비가 많이 내린다. 뻬드로우소에 도착,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니 집주인 아줌마가 차를 타고 와서 열쇠를 주고 간다. 오늘도 역시 집 전체를 우리 부부 독차지한다. 순례자가 없는 비수기라서 누리는 호사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비가 멈춘 틈을 타서 시내 구경 겸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길 가의 작은 레스토랑을 골랐다. 술에 취했는지 젊은 주인 남자가 혀가 꼬인 채 손님을 맞는다. 특별히 악의가 있거나 위험하지는 않아 보여서 모르는 척 식사를 했다. 음식은 뜻밖에 정갈하고 먹을 만하다. 나오면서 보니 중년의 아줌마가 주방에서 나온다. 주정뱅이 아들을 데리고 장사를 하고 있구나, 아들이 저 모양이니 장가도 못 들고 손님도 별로 없는 모양새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구분이 안 된다.



산티아고 입성. 11월 22일



오늘은 순례 마지막 날,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아스팔트 길은 빗물이 채 빠지지를 못해 물에 잠겼고, 빗방울이 얼마나 굵은지 마치 우유방울처럼 크라운을 만들어댄다. 조금 기다려야 하나, 아예 하루를 쉬어야 하나. 그러나 기다린다고 가늘어질 비도 아니고 이제 시작하는 우기가 하루 이틀 만에 끝날 것도 아니다. 용기를 내어 마지막 날을 시작했다.


유칼립투스 숲길을 지나고 작은 마을을 지나고 산티아고 공항을 지난다. 공항을 지난다고 말했지만 이 과정이 만만치 않다. 공항을 빙 둘러서 길이 나 있는 데다가 아스팔트 길과 숲길을 넘나들며 수시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음을 들으며 걷는다. 중세 순례자들은 드디어 순례의 목적지 성스러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감흥만을 느꼈겠지, 처음으로 그들이 부럽다. 다행히 하루 종일 퍼부을 것 같던 비는 그쳤다 내렸다 반복하는 정도다.



산티아고 시내에 진입했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인 대성당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순례자를 위한 식당과 숙소, 기념품 가게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있다. 산티아고는 순례자들을 위한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구가 17만 명 정도라는데 매년 이곳을 찾는 순례자가 그보다 많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드디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800km의 대장정이 끝났다. 대단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거리를, 무려 한 달 여 만에 걸어서 오다니. 수많은 사람들이 해 낸 일이고 이보다 더 힘들고 먼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부부의 순례가 대단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다. 한 달간을 두 발로 걸어냈다는 사실, 그 길을 나서기로 용기를 냈다는 사실, 어쩌면 긴 기간을 포기하지 않고 스페인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이미 승리자인 셈이다. 이로써 내 인생의 많지 않은 승리의 돌탑 위에 새로운 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순례를 마쳤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의 답을 얻거나 큰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 길을 걸어냈다는 사실이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과 자신감을 준다. 30년 직장생활 끝에 마침표 하나를 찍은 느낌이랄까? 이제 마침표를 찍었으니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 같은 거 말이다. 어쩌면 이 느낌은 순례를 하는 순간순간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내 속에 쌓이고 막혔던 것들이 조금씩 녹아내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800km를 걷고 나니 이제 더 이상 마음의 찌꺼기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 마치 인생을 초기화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까?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힘든 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해서, 그리고 30년간 부부로 큰 탈 없이 잘 살아온 것에 대해서, 또한 리셋된 새로운 인생을 함께 살아갈 남은 시간들을 위해서 말이다.


비가 막 그친 광장 바닥이 햇살을 받아 거울처럼 빛난다. 그 거울 위에서 우리처럼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기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여기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순례 중에는 느끼지 못했던 홀가분함과 묘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들도 자신들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들을 조금씩은 내려놓은 것 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완주증을 받기 위해 순례자협회를 찾았다. 중간에 택시와 버스를 탄 걸 알면 어쩌나, 그러나 출발지와 날짜를 확인하면 그만이다. 약간의 비용을 내고, 기념품 삼아 완주증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승리자로 인정하는 완주증을 나 스스로에게 주었으니 큰 의미는 없다.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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