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숙소에서,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수다로 하루를 푹 쉬고 나니 아침 발걸음이 가볍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140km 남짓, 천천히 걸어도 일주일이면 끝날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한 달 가까이 눈만 뜨면 걸었으니 이젠 걷는 게 징글징글하기도 하고, 막상 걷는 게 끝나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하다. 산티아고까지 남아있는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게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아쉽다. 이렇게 걷고 있는 지금이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스페인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들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지 않을까, 어쩌면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오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제저녁 숙소에서 들은 얘기 때문이리라. 한국 순례자 한분이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40일을 걷지만 훨씬 오랫동안 이걸 추억하면서 살아간다고. 과거에 묶이지 말고 현재에 머물러라,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순례길은 언덕을 넘고 들판을 지나고 강변을 따라 펼쳐진다. 늦가을의 단풍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얼굴에 닿는 아침 공기가 상큼하다. 한국의 단체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리아에 도착했다.
내게 사리아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일종의 전환점 같은 느낌이다. 이곳에서 산티아고까지 대략 100km쯤 되는 데다가 경치가 아름다워서 순례 기간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종의 단축 순례로 이 구간을 걷는단다. 혹은 론세스바예스에서 부르고스나 레온 까지만 걷고 중간을 뛰어넘어서 사리아부터 걷기도 한단다. 중간에 아스팔트 길을 따라 도시지역을 걷던 기억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선택이다.
순례기간을 통틀어서 가장 예뻤던 사리아의 숙소
사리아에서는 묵었던 알베르게 자랑을 빼놓을 수가 없다. 여느 때처럼 앱을 통해서 숙소를 예약하고 짐을 보냈는데, 찾아와 보니 예쁘장한 돌집에 아래층은 주방과 거실, 위층은 침실로 꾸며져 있다. 거실에는 펠릿 난로가 따끈하게 피워져 있고, 돌기와와 돌 벽으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침실은 마치 아름다운 집 잡지에라도 나올 것 같이 예쁘다. 집이 너무 예뻐서 감탄하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자기는 퇴근할 테니 잘 자란다. 별장 같이 예쁜 집 전체를 단 돈 40유로에 하룻밤 전세를 냈다. 물론 비수기라서 손님이 달랑 우리 부부밖에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괜히 아래 위층을 오가며 차도 마시고 난롯불도 쬐며 호사를 부렸다.
사리아(Sarria) – 뽀르또마린(Portomarin), 11월 18일
다음날 아침, 웬 한국말이 들려와서 내다보니 조그만 광장에 수십 명의 순례자들이 체조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어제 도착한 신참 순례자들이다. 순례 첫날 아침을 맞으니 얼마나 설레고 기대가 클까 싶다. 길을 걸으며 이 분들과 계속 마주쳤는데 그냥 딱 봐도 새로 온 신참 티가 줄줄 난다. 첫째는 옷과 얼굴들이 깨끗하다. 우리 부부는, 한 달째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은 데다가 피곤에 찌들어 뭔가 지저분한 관록이 느껴지는데 새로 온 분들은 깔끔한 등산복에 새로 산 신발에 판쵸우의도 반짝반짝 빛난다. 말투도 좀 다르게 느껴진다. 뭔가 도시적이고 깔끔한 느낌이랄까, 세련된 어휘와 억양들이다. 길을 걸을 때는 사소한 것에도 감탄하고 사진을 찍는다. 중간에 카페라도 들르면 꼭 순례자 여권을 내밀고 확인 도장을 받는다.
그분들도 우리 부부에게 관심을 갖고 물어본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나, 며칠이나 걸렸나, 힘들지 않냐. 한 달째 걷는다는 말에 모두들 대단한 눈으로 바라본다. 별것도 아니라고, 그냥 걷다 보니 한 달이 돼 간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면서도 기분은 우쭐하다. 하긴 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대단한 일, 평생 처음 해 본 일이다. 이제 순례자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다.
뽀르또 마린, 이미 지명에서도 느껴지거니와 지금까지 내륙지방에서 보아온 스페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우선 넓은 강이 탁 트인 데다 강을 건너는 다리가 제법 아름답다. 마치 충주호를 바라보는 느낌, 알고 보니 1960년 댐 수몰로 다리와 마을이 새로 건설되었단다. 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오르니 숙소가 있는 마을이다. 마치 휴양지처럼 물을 바라보며 깔끔한 마을에서 며칠 남지 않은 순례를 알뜰하게 즐기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뽀르또마린(Portomarin) - 빨라스 데 레이 (Palace de Rei) 11월 19일
숙소를 나서서 순례를 시작한다. 까미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어제 건넜던 다리를 다시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넓지 않은 통로를 통과하기 위해 단체 순례자들이 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스탭들이 서서 인원을 세는지 순례자들을 체크한다. 우리는 단체가 아니라고 말하고 지나쳤지만 좀 신경 쓰이는 일이다. 숲길과 오솔길로 이어지는 코스를 여럿이 함께 걷는 것도 그리 편하지는 않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혹시라도 남에게 피해를 줄까, 아무래도 마음이 쓰인다. 중간중간 들르는 카페에서도 마찬가지다. 순례자들이 거의 사라진 시즌이라서 열려있는 곳이 드문드문한데 넓지 않은 카페에 갑자기 50여 명이 들이닥치면 난리가 아니다. 아무래도 시끄러워지고 기다려야 하고 화장실 사용도 쉽지 않다.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이라서 반가웠는데, 길을 걷다 보니 솔직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단체 순례를 하는 사람들은 한국사람뿐이다. 대부분 혼자, 혹은 부부나 친구가 두세 명 함께 올뿐이다. 더구나 여행사 직원들이 스탭으로 참여하여 안내를 하거나 중간중간 차를 대 놓고 기다리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나라마다 독특한 관광문화가 있을 수 있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련만, 솔직히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다. 30년쯤 전이었을까, 일본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수십 명이 단체로, 가이드를 따라 깃발을 들고 다니는 모습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낯설게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국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왜 단체 투어를 할까? 동선이 복잡할 것 없이 그냥 두 발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 걷는 순례길에 안내가 필요할까? 단체여행을 나선 분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언어장벽 때문일 것 같다. 항공권 구입이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한다고 치고, 현지에 와서 숙소를 잡거나 밥을 먹으려면 영어나 스페인어가 필요한데 이게 자신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어 시원찮고 스페인어 단어 몇 개만 익혀온 우리 부부의 경우만 해도 순례를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순례는 말이 거의 필요 없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고 중간중간 이정표와 가리비, 화살표가 끊임없이 있으니 벗어 날 일도 없다.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을 보고 싶으면 스마트폰을 켜면 대부분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검색된다. 외국어 안내판이 궁금하면 사진을 찍어서 해석해주는 앱이 있으니 아무 문제없다. 식당과 숙소에서 방을 빌리고 음식을 주문하려면 약간의 외국어가 필요하지만 사실 단어 몇 개 정도면 해결된다. 좀 복잡한 말을 하고 싶으면 스마트폰에 번역 앱만 켜면 된다. 좀 번거로울 뿐이지 말이 안 통해서 곤란을 겪지는 않는다. 문제는 울렁증이다. 외국어를 못한다는 부끄러움, 틀리면 어쩌나 하는 쪽팔림 이런 감정 말이다.
그런데 영어 울렁증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우리가 베트남어나 태국어를 못한다고 울렁증을 겪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못한다고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없다. 그런데 영어는 다르다. 알아듣지 못해서 쪽 팔리고, 틀릴까 봐 입이 안 떨어지기 일쑤다. 어쩌면 학교에서 영어시험 보던 악몽 때문일까, 아니면 미국에 대한 열등감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놈의 영어가 참 사람 힘들게 한다. 그런데 막상 내가 나와 보니 영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는 거다. 그냥 단어 몇 개정도 쓰면 되고, 꼭 필요하면 스마트폰이 있다. 만일 단체 순례를 떠나는 주된 이유가 언어장벽이라면 꼭 귀담아 들었으면 싶다. 영어? 못해도 된다.
비를 맞으며 빨라스 데 레이에 도착, 예약한 숙소에 들었다. 이 도시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이 문어요리다. 잘하는 곳이라는 식당까지 알아놨는데, 아쉽게도 오늘 영업이 끝났단다. 한국 단체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재료가 동났기 때문이란다. 어쩔 수 없다. 구글 맵으로 주변 식당 검색을 한다. 식당 위치와 메뉴, 평점, 가격, 마지막으로 길안내 등 웬만한 정보는 다 나온다. 문제는 입소문만큼 순도가 높은 정보는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찾은 맛집에서 문어요리를 시켰는데, 가격에 비해 만족도가 낮다. 문어는 싱싱한데 너무 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