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혹

로드 에세이

by 심웅섭

26. 유혹


발 카라쎄 (Valcarace)– 뜨리아까스뗄라(Triacastela), 11월 16일



한 방에서 잔 한국 사람이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7명, 연장자답게 아침을 사겠노라고 큰소리치고 카페에 갔는데 커피에 토스트 정도의 간식만 준비돼있다. 돈은 굳었지만 폼은 좀 구겼다.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주된 화제는 언덕을 넘어 폰 피리아까지 걸을 것이냐 말 것이냐다. 간밤에도 눈이 제법 내렸고 아직도 그치지 않고 내린다. 순례를 하는 한국 젊은이들끼리 단톡 방을 만들어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데, 앞서 고개를 넘어간 멤버들에게서 걸어 넘지 말라는 톡이 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넘어야 할지, 하루 더 쉬어야 할지, 혹은 택시를 타야 할지 모두들 결정을 못하고 있다. 나는 좀 느긋하다. 발목 부상 이후 잔뜩 비겁해진 나는 이미 아내를 설득해서 택시 번호까지 확보한 터이다.


그런데 일행 중에 남매가 맘에 걸린다. 중학생 나이라는 남동생과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누나가 함께 순례 중인데 덩치에 비해 어린 나이라서 놀랐던 적이 있다. 둘이 다 학교에 있을 나이인데 산티아고 순례 중이니 무언가 힘든 인생의 고개를 넘고 있나 보다. 한편으로는 스페인까지 나선 용기가 대단하고 누나와 남동생이 함께 손잡고 넘고 있으니 고맙고 든든하기도 하다. 문제는 둘 다 많이 지쳐 보이는 데다가 옷이 얇다는 거다. 둘 다 패딩도 아닌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있다.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옷이 너무 얇아서 추울 텐데, 우리 부부랑 택시로 산을 넘는 건 어때?

뭐 어차피 택시비는 둘이 타나 넷이 타나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내고......"


남동생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린다. 많이 힘든가 보다.

누나가 대답했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네요. 제가 동생이랑 상의해서 알려 드릴게요”


아니 뭐, 상의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당연히 같이 가겠지. 그런데 잠시 후의 대답은 정중한 거절이다. 좀 춥고 힘들겠지만 그냥 산을 넘어보겠단다.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뭉클하고 올라온다. 그래, 너희들 대단하다. 이 먼 스페인 순례길까지 와서 마음도 지치고 몸도 추울 텐데,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을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다니. 눈 쌓인 언덕뿐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너희에게는 문제가 안 되겠구나. 쓸데없는 호의로 남의 인간승리 휴먼다큐를 싸구려 미담 프로그램으로 만들 뻔했구나. 결국 두 남매는 눈을 헤치고 고개를 넘었다. 어쩌면 이 날이 남매에게는 평생 동안 힘이 되어 줄 승리의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리의 기억, 힘든 상대나 엄청난 고난을 참고 이겨 낸 승리의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준다. 비슷한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 기죽지 않고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작은 승리의 기억이 더 큰 승리로 이끌기도 한다. 마치 적은 양의 바이러스를 백신으로 맞고 나면 더 큰 바이러스를 이기는 것처럼 말이다. 남매는 바야흐로 평생 효과가 지속될 귀한 승리 백신을 맞으려는 찰나였고, 나는 그걸 못하도록 유혹했고, 남매는 그 유혹을 뿌리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매가 내 유혹을 뿌리침으로써 갑자기 내 역할도 그리 나쁘지 않은 캐릭터가 됐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장치, 춘향전으로 치자면 수청을 요구한 변사또나 심청전의 공양미를 요구한 스님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나에게는 승리의 기억이 있을까? 갑자기 머뭇거려진다. 어릴 적에 우등상을 받았다던지 이런저런 애들 감투를 썼다던지 혹은 좋은 학교나 회사에 들어갔다던지...... 이런 행운이 대부분인 승리 아닌, 유혹과 고통을 이겨내고 뭔가를 이루어 낸 나만의 승리 말이다. 뭐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나름 승리로 기록될 것들이 없진 않다. 군에서 부당한 선임병과 선임하사에 맞서 자존심을 지켰던 일, 특공연대에 차출되었을 때 핑계만 대면 빠져나갈 수도 있었는데 버텨낸 일 정도다. 그런데 기껏 생각해 낸 기억이 겨우 두 개, 그것도 승리의 기억이라기보다는 저항의 기록이라는 말이 맞을 듯싶다.


눈길을 헤치고 택시는 언덕을 오른다. 제법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폭설에 아직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제설작업을 한 덕에 택시는 별문제 없이 달릴 수 있지만 간간히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힘들어 보인다. 정상을 지나서는 오 세 브리오라는 마을이 보이고 이곳에서 출발한 듯한 한국 단체 순례자들도 보인다. 여러 차례 마주치고 식사도 같이하다 보니 이젠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짐작할 정도다. 좀 미안하다. 남들은 다 눈을 헤치고 고개를 넘는데 나는 무서워서 택시를 타고 간다. 그리고 좀 창피하다. 걸어서 넘자는 아내를 온갖 이유를 대 가며 설득해서 택시를 태운 것이 말이다.

트리아까스뗄라는 길옆의 작은 마을이다. 그나마 작은 마트와 몇 개의 알베르게, 카페가 있어서 머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정갈한 숙소에서 맛있는 식사도 해 먹고, 뒤늦게 도착한 한국 순례자들과 음식과 수다를 나누면서 몸과 마음을 푹 쉬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첫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