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생활계획표를 참 많이 그렸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흐트러진다, 싶으면 언제든 백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줄이 쳐진 공책에서 한 장 찢어 쓸 수도 있었지만, 그건 요즘말로 '간지'가 살지 않았다. 복사지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 깨끗한 종이를 구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종이를 얻으면 컴퍼스를 꺼내 백지 윗부분에 커다란 원을 그린다. 시간표는 그 원을 따라 빼곡히 배치된다. 맨 위를 밤 12시, 맨 아래를 낮 12시로 정해 칸을 나누고, 그 안에 하루 일과를 적는다. 아침 6시 기상, 30분 체조와 세수, 1시간 아침 공부, 8시에 밥을 먹고 학교 가기, 오후엔 숙제와 집안일, 밤 10시면 일기 쓰고 잠들기…. 교과서적으로 완벽한 삶이 동그란 시계 속에 들어앉았다.
문제는 그 생활계획표를 너무 자주 그렸다는 것이다. 그만큼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침 6시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억지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도 금세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잠들기 일쑤였다. 숙제 시간은 친구들과 노느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낮에 너무 신나게 놀아 초저녁 밥만 먹으면 곯아떨어졌다. 일기는 늘 미루다가 검사 날이 가까워 며칠 치를 헐레벌떡 채워 넣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임계점 같은 게 찾아왔다. 그러면 마음을 다잡듯이 다시 백지를 꺼내 새로운 생활계획표를 그렸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생활계획표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내 하루 일정은 이미 다른 힘들(가족과 회사)에 의해 완벽히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먹고 출근하기 바빴고, 회사 사정에 따라 야근도, 새벽 출근도 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놀아주고, 밤이 되면 졸린 눈을 부릅뜨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책을 읽다가 조는 내 눈꺼풀을 딸아이가 손가락으로 벌린 기억도 있다. 이렇게 정해진 시간표 속을 분주히 뛰다 보니 따로 계획표를 그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다시 생활계획표를 그리기 시작한 건 은퇴하고부터였다. 그런데 이제의 계획표는 예전처럼 커다란 원 안에 시간을 촘촘히 나누어 넣는 방식이 아니다. 하루의 중요한 몇 가지를 글로 적어두는 식이다. "아침 6시 기상, 한 시간 독서", "7시 반부터 한 시간 산책", "화요일은 세조길 걷기", 이처럼 느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들이다. 그리고 설혹 그 일정이 지켜지지 않아도 조바심을 내거나 계획표를 다시 그리지 않는다. 이제 계획표는 나를 감시하는 감독관이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일을 부드럽게 알려주는 알람 같은 존재가 되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생활계획표보다 한층 더 크고 엉성한 ‘인생계획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 일 년 단위로, 올해는 무엇을 해볼까를 스스로 묻는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 시 공부를 해서 3년 뒤 등단을 목표로 하기, 주변 마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아내와 한 달씩 외국에서 지내보기…. 이런 것들은 계획이라기보다 인생이라는 항해에 세우는 작은 등대에 가깝다. 하루하루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그래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방식이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몇 년 지나고 돌아보면 매해 세운 계획들이 놀랍게도 대부분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완벽하게 지켜서가 아니라, 그 방향을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의 계획은 고민 중이다. 우리 마을 역사를 다큐로 만들까, 사진으로 기록한 집들을 인터뷰와 가족사를 얹어 시리즈로 엮어볼까를 생각 중이다. 뭐가 더 좋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스스로 살아갈 방향을 희미하게라도 정해보는 일,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어린 시절 수백 장의 생활계획표가 결국 나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주었듯, 지금의 느슨한 인생계획표도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우리의 삶이 향상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새해‘라는 백지 위에 조용히 또 하나의 방향을 그려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