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 안개와 어둠이 반씩 섞인 이른 시간에 밭일을 시작한다. 오늘의 과업은 참외밭 정리다. 쉰 평 남짓한 텃밭에 참외와 고추, 땅콩을 심었는데 그중에서 참외를 걷을 참이다. 넝쿨 걷기는 참 쉽다. 무성한 넝쿨에 비해, 뿌리는 뜻밖에 깊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풀이다. 게으른 주인 덕에 참외 넝쿨 옆에는 마음껏 자란 풀이 무성하다. 그래도 쇠비름이나 괭이풀 정도는 뽑을 만한데, 피와 방동사니, 바랭이는 땅에 딱 들러붙어 두 손으로 움켜잡고 용을 써야 한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덕에 해가 뜨기 전인데도 땀이 흥건하다.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밭이 훤해졌다. 이제 모종과 씨를 사다가 심고 뿌리기만 하면 된다. 불과 세 시간 만에 가을농사 준비가 다 된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을농사를 시작한다. 심는 작물은 단순하다. 배추 쉰 포기, 무와 총각무, 가끔은 겨울에 차를 끓이기 위해 수박무를 심는다. 그중에서 자랑거리는 배추다. 형편없이 작고 듬성듬성 벌레까지 먹었지만 짱짱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덩치 크고 물기 많은 시중 배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게다가 가을농사는 봄농사에 비해 쉽다. 우선 풀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웬만한 잡초는 이미 씨를 맺어 퍼뜨렸으니 이제 새로 싹을 내밀 녀석은 없다. 당연히 뽑거나 제초제를 뿌릴 일이 없다. 사실 농사의 절반 이상이 풀과의 전쟁인데, 이걸 안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장점이 된다. 농약을 쓸 일도 훨씬 적다. 늦더위가 남아 있는 9월 정도까지는 벌레가 달려들지만,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면 덜해지다가 서리까지 내리면 마지막 벌레마저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다.
결정적인 장점이 하나 더 있다. 가을 농사는 선택사양이자 덤이라는 거다. 봄농사 만으로도 충분히 거둔 사람, 혹은 쉬고 싶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좀 일찍 밭을 놀린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다. 이러니 농사를 짓는 이도 마음에 여유가 있다. 물론 소일거리로 텃밭 농사를 짓는 경우 말이다.
정년퇴직 후에 어쩌다가 마을카페를 열었다. 인생을 농사에 비교하자면 가을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우선, 할 일이 생겨서 좋다. 아침이면 시간에 맞춰 문을 열기 위해 서둘러 밥을 먹고 집을 나선다. 도착해서는 음악을 들으며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재료를 점검한다. 손님이 오면 차를 내고 이런저런 소식과 이야기를 나눈다. 중간중간 시간이 날 때면 카메라를 메고 이웃 마을과 사람들을 찍으러 다니기도 한다. 봄농사에 비해 소출은 한참 적은데 은근히 재미있다. 무엇보다 인생에 덤으로 주어진 기회가 고맙고 소중할 뿐이다. 내친김에 겨울농사까지 지어볼까나 하는 생각도 얼핏 들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한다. 이제 막 시작한 가을농사가 마무리되려면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