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레네의 기적

로드 에세이

by 심웅섭

5. 피레네의 기적

생 장 (St.Jean)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10월 19일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 첫날이다. 한국을 떠난 지 5일 만에, 원래 목적이었던 순례를 시작한다. 날씨는 맑고 따뜻한데 바람 한 점 없다. 순례자들은 일찍 아침을 먹고 도시락으로 주는 샌드위치를 챙겨 넣고 숙소를 떠났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떠날 수가 없다. 묵직한 히말라야 침낭과 어제 골라 놓은 옷가지들을 한국으로 부쳐야 한다. 이리저리 물어 9시 전에 우체국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다. 토요일은 10시에 문을 연다고 쓰여 있다. 한참을 기다리니 직원이 출근하고 문을 연다. 짐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서니 10시 반이 넘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첫날 코스는 사실 프랑스 루트 중에서 가장 길고 힘든 길이다. 우선 거리가 27km로 긴 데다 해발 1410m의 산을 넘어야 한다. 더구나 이 코스는 날씨 변덕이 심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심할 때는 여름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짙은 안개와 악천후에 종종 조난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하루 만에 넘기도 하지만 산 중턱의 오리손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 더 머물고 가기도 한다. 그만큼 일찍 떠나야 하는데, 짐을 부치느라 늦어지고 순례길 출발점을 찾느라 헤매고, 결국 11시쯤에야 순례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의 주택지를 지나고 나니 밭들과 목초지 사이로 난 길이 조금 더 가팔라진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에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들이 군데군데 떠 있다. 며칠 동안 비행기며 도시에 시달리며 쌓였던 스트레스가 마치 눈 녹듯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다. 다리에 묵직하게 전해오는 대지의 느낌에 가슴이 스멀스멀, 음 이건 내 몸과 영혼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좋다. 아내와 단둘이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멀리 가 버렸으니) 멀리 스페인까지 와서 이 호젓한 길을 걷다니, 꿈만 같다.


피레네 산맥, 세계지리 시간에도 배웠던 터라 대단한 산맥인 줄 알았는데 말이 산맥이지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의 큰 오름 정도다. 해발은 1410m라지만 워낙 경사가 완만하고 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넓어서 산이라기보다는 큰 언덕이라는 말이 맞을 듯싶다. 이 길은 흔히 나폴레옹 루트라고 부른다.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명을 받은 스코트 장군이 스페인을 침략하기 위해 군사와 대포를 끌고 넘어가면서 개척한 길이란다.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얘기는 좀 그럴듯한데 뭐 이 정도의 산을 대포 좀 끌고 넘었다고 그게 대수일까 싶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승리의 역사이겠지만 스페인으로서는 치욕의 역사일 텐데 굳이 나폴레옹 루트라고 이름 붙일 것은 무어란 말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르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방울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처음에는 풍물패들의 연주 소리인가 싶다가 생각해보니 여기는 피레네 산맥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먼 데서 들려오는 가축들의 방울 소리다.


그런데 산들의 생김새가 재미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은 삐죽삐죽 솟아 나무가 울창하고 간간이 바위들이 어우러지고, 뭐 이런 모습들인데 여긴 전혀 다르다. 크고 작은 언덕들이 연이어 있고 무엇보다도 나무가 아니라 풀로 덮여있다. 동글동글 풀로 덮인 산들을 보니 마치 스머프 나라에라도 온 것 같다. 아마도 목초지로 개발한 것 같은데, 강수량이 많지 않고 연중 고르기에 가능하리라. 이국적인 산의 모습과 양들의 방울 소리를 즐기며 산을 오른다.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살랑살랑 내 몸을 간질인다.



조금 더 오르다가 다리도 쉴 겸,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나, 이런 광경이! 크고 작은 동글동글한 산과 들과 마을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지평선 끝까지. 멀리 보이는 뭉툭한 산에는 길이 마치 실 한 올이 걸친 듯 보일락 말락 눈길을 끈다. 하늘에는 하얗고 앙증맞은 구름들이 마치 양 떼처럼 달려가고,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군데군데 환상적인 명암 대비를 만들어 낸다. 어쩌면 지중해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왔을 법한 바람은 적당한 세기와 리듬으로 내 몸을 어루만지고, 가슴이 자꾸자꾸 넓어진다.


내가 점점 가벼워진다.

눈길이 점점 멀어진다.

저 산들을 따라가면 프랑스도 나오고 독일도 나오고 핀란드에 러시아까지도 갈 수 있겠지. 마음은 벌써 유럽 대륙을 넘어 북극까지 달려간다. 아, 행복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내에게 선언했다.

”여보, 내가 이 여행의 남은 기간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았어.

이제부터 나에게 오는 행복은 모두 덤이야 “

그러나 상황이 돌변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것은 바람. 슬금슬금 강도를 높이더니 언제부턴가 맞바람이 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걸 버티려면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하니 힘이 곱절로 든다. 세찬 바람에 모자가 두 번이나 날아갔는데, 배낭을 멘 채 죽자 사자 뛰어가서 주워오기는 했지만 자칫 경사진 언덕으로 구를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세 시간쯤 오르자 이번에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해가 가려지니 어둡고 춥다. 정상 부근에는 양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샘도 보이고 다른 마을로 가는 샛길도 보인다. 웬만하면 사진이라도 찍을 만한데, 손이 시려서 엄두가 안 난다. 여행기에 보니 피레네를 넘다가 죽을 뻔한 이야기들이 있더니만, 괜한 말이 아니었나 보다.


도시락으로 싸 온 샌드위치를 꺼내 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면서 점심을 먹었다. 따뜻한 커피, 아니 뜨거운 물 한잔이 그리웠다. 에그, 보온병이라도 챙겨 올 걸, 후회가 막심하다.


이제부터는 행복감이고 뭐고 빨리 가는데 장땡이다. 정상을 지나 스페인 쪽 능선으로 짐작되는 하산 코스에 접어드니 다행히 바람이 잦아진다. 늦가을의 낙엽이 쌓인 호젓한 산길을 밟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오후 4시, 어느새 햇살이 힘을 잃었다. 숙소에 7시까지는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면 빠듯할 것 같다.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으로 내려가는 중



5시쯤 되어 순례자 한 명이 따라오더니 우리 부부를 앞지른다. 세상에, 우리보다 더 늦게 떠난 사람도 있다니. 걸음걸이가 빠른 것으로 봐서는 어쩌면 점심을 먹고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붙여보니 독일에서 왔단다. 자기도 7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앞서 부지런히 산에서 내려간다.



6시가 됐다. 숲 속이라 그런지 약간 어두컴컴해진 느낌이다. 웬 남자가 바구니를 들고 셰퍼드로 보이는 개와 함께 숲 속에서 나타났다. 성큼성큼 걸어오기에 뭐하냐고 물으니 버섯을 딴단다. 무슨 버섯이라고 보여주는데 잘 모르겠다. 순간 순례자로서, 더구나 순례 첫날에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왔다.



”너, 혹시 우리 좀 태워다 줄래? “


곤란한 표정으로 차에 짐이 많아서 안 된단다. 봐서는 그리 많지도 않은데, 혹시나 하고 물어보긴 했지만 서운하다.



6시 반, 아무래도 숙소에 제시간에 닿기는 어려울 것 같다. 론세스바예스에 알베르게가 달랑 하나라는데, 더군다나 7시가 마감이라는데, 힘도 들고 불안하기도 하다.


이때 필요한 게 기적이다. 바욘 역에서 나타난 행운보다 더 드라마틱한 기적이 딱 맞추어 나타났다. 차 한 대가 숲 속 길로 올라온 것이다. 일행도 없고 짐도 없고 도대체 그 시간에 왜 나타났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마음씨 착한 아저씨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깟 언어가 문제랴, 스페인어 단어 한두 개에 표정과 손짓 발짓으로 도움을 청했다.


아저씨는 너무나 선선히 알베르게까지 태워다 준단다. 아니 그러실 것까지 없다, 그냥 부근에만 내려다오, 사양했더니 자기가 그 성당에 살고 있단다. 그제야 짐작이 간다. 오, 이게 바로 기적이구나, 멀리 한국에서 30년 만의 휴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기특한 부부를 위해서 야고보 성인께서 사람을 보내셨구나, 아멘 감사합니다.



아슬아슬 숙소에 도착, 체크인했다. 비수기라 침대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를 앞질렀던 독일 젊은이가 뒤늦게 도착해서는 우리 부부를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걷는 속도로 봐서는 우리가 자기보다 한참 늦게 도착해야 하는데, 먼저 와서 턱 하니 쉬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궁금하면 물어나 보든가, 물어보지 않으니 먼저 설명할 수도 없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인마, 우린 빽이 있거든’



처음으로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에 묵는다. 오래된 성당을 개조한 듯, 건물은 중세풍인데 시설은 깨끗하다. 2층 침대가 수백 개는 되는 듯하고 화장실과 샤워 시설도 훌륭한데 가격은 하룻밤에 10유로다. 가톨릭 교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평온하고 친절하다. 체크인하며 여행의 목적과 종교를 적는 난이 있다. 조금 고민 끝에 종교는 가톨릭으로, 여행 목적은 종교적 순례로 적었다. 이미 야고보 성인의 덕을 본 후니, 이 정도는 해 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처음으로 순례자 메뉴를 접했다. 뜨거운 수프와 닭다리 스테이크, 채소 샐러드, 빵 한 조각, 와인 한잔. 정갈하고도 맛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부터 도착까지의 행복했던 순간들과 힘들었던 순간들, 짠하고 나타난 기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첫날이 이 정도니 앞으로 얼마나 더 놀라운 풍경과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우리 부부에게 다가올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공짜택시의 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