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부자가 되다

백수, 알고 보면 전문직이다

by 심웅섭

2019년 1월 1일, 드디어 퇴직을 했다. 사실은 정식 퇴직에 앞서서 일 년간의 안식년을 맞이한 것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자칫, 수신료 받는 공영방송에서 일도 안 하고 월급 준다는 식의 오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KBS는 정년이 58세에서 60세로 늘면서 임금피크제와 안식년제를 도입했다. 58세까지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늘어난 2년 중에 일 년간은 70% 월급에 정상근무, 마지막 일 년은 49% 월급에 안식년을 준다. 결국은 일 년 치가 약간 넘는 119%의 임금으로 일 년간은 근무하고 일 년간은 쉬는 셈이니 엄청난 특혜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내 인트라넷에 들어가 보니 안식년, 366일의 휴가가 찍혀있다. 헉, 366일의 휴가라고? 숫자를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5일간의 휴가에 앞 뒤 휴일을 붙여서 9일만 돼도 엄청나게 행복했었다. 설이나 추석에 재수 좋아서 5일 휴일을 받아도, 하다못해 주말에 국경일을 붙여서 3일 휴일만 해도 연휴라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366일 휴가라니,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더구나 그 366일 뒤에도 휴가는 끝나지 않는다. 365일짜리 휴가가 10년이고 20년이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쭉 계속된다. 갑자기 돈벼락, 아니 시간 벼락을 맞은 듯 멍해질 만큼 행복했다. 상상해보시라. 당신의 통장에 하루아침에 수십억 혹은 수백억의 잔고가 턱 하니 찍혔을 때 어떤 느낌일까를 말이다. 어차피 웬만한 행복과 즐길거리는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니 돈과 시간은 약간의 대체효과가 있을 것이다. 돈은 아니지만 엄청난 시간이 갑자기 주어졌으니 이제 나는 벼락부자다.


평생 돈이 없어서 쩔쩔매던 가난뱅이가 하루아침에 수 십억 부자가 된 기분이 이런 걸까? 자꾸만 통장을 꺼내어 믿어지지 않는 숫자를 바라본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벙싯벙싯, 행복감이 가슴에 벅차오른다. 아침이면 느긋하게 눈을 떠서 아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배가 고파지면 슬슬 일어나서 아점을 챙겨 먹는다. 음질 좋은 진공관 앰프로 음악을 들으며 여유 있게 커피를 내려서 마시고 햇살이 퍼지면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겨울이 끝나면 어딜 갈까, 여행지를 고르며 아내와 행복한 꿈을 꾼다. 세상에 부족한 게 없다. 내 인생에 이런 순간도 찾아오는구나, 아니 어쩌면 인생은 원래 이래야 하는 건데 그동안 못 누리고 살았구나. 앞으로 내가 회사에 출근할 일은 없을 테니 어쩌면 이런 행복은 죽을 때까지 쭉 이어지겠구나.


그런데 통장 잔고만으로 행복한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나고 나니 이제는 366일이라는 숫자가 심드렁해졌다. 수십, 수백억의 통장 잔고가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백수로서 최초의 깨달음이 번뜩하고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하지는 않다.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뭐 당연한 얘기다. 통장에 수 십억이 찍혔더라도 그걸 바라보는 것 만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다.

결국 돈은 내가 원하는 무얼 사기 위한 수단일 뿐,

시간도 내가 하고 싶고 재미있는 걸 해야 비로소 행복한 건 뻔한 이치다.

3월 중순, 일을 벌였다. 데크를 넓혀서 아예 실내공간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미 데크 위에 서툰 솜씨로 지붕을 해 덮어 파고라로 쓰고는 있었는데 여름이면 너무 덥고 비가 오면 눅눅해지니 불편했다. 벽을 세우고 창을 달고 지붕을 제대로 만들어서 홈 카페 겸 응접실 겸 음악감상실로 만들 작정이었다. 시간과 돈은 대체재라, 돈은 줄이고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재료비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내 손으로 짓기로 한 것이다.

마침 아랫집에 동갑내기가 이사를 왔다. 아주 적은 실비에 자원봉사 겸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그러란다. 지인 중에 전문 목수를 하루 모셔다가 자문을 받고는 이리저리 도면을 그리고 자재를 뽑고 목재들을 들여왔다. 자주 하는 일이 아니고 보니 시행착오도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뭐 관계없다. 시간은 무궁무진 나는 시간 부자 아닌가?


자로 재고 줄을 띄우고 땅을 파서 초석을 묻고 6인치 방부목을 세우고......, 그렇게 기초를 했다. 수평을 체크하며 기둥들에 대들보를 고정하고 프레임을 엮고 상판 방부목 위에는 합판을 고정했다. 제대로 된 목수가 아니니 시간은 두배 세배 걸리고, 뭔가 엉성한 데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내 손으로 하는 작업에는 마력이 있다. 아무리 엉성해도 내 눈에는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묘한 마력이다. 바라보고 만져보고 밟아도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부자는 참 편리하고 행복하구나,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되고 보니 이렇게 행복한 걸 지금까지 그걸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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