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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Mar 31. 2021

꽃과 호수따라 꿈길을 가듯

대청호 오백리길 3코스

 가는 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두 대의 승용차에 9명의 백수들이 나눠 타고 회인에서 출발했는데, 불과 10분을 달려 대청호와 만나는 회남을 지날 때부터 벚꽃들이 만개해있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개화시기가 차이 나는 걸 보면 역시 대청호는 물가라서 따뜻한가 싶다. 이렇게 시작된 벚꽃길은 오늘의 출발지인 찬샘정까지 이어졌고 덕분에 가는 길 내내 꽃길과 꽃터널을 지나는 호사를 누렸다.  

 

 찬샘정, 원래는 대청호 오 백 리 길 2코스의 마지막 1km쯤에 있는 정자다. 엄격히 말하자면 2코스인데 오늘 이곳을 출발지로 삼은 것은 지난번 트레킹 때 여기까지만 걸었기 때문에 빼놓지 말고 꼼꼼히 챙기자는 의미다. 여기에 4코스의 시작 부분 3.5km를 보태서 약 12km 남짓을 걸을 예정이다. 3코스가 8km로 다른 코스에 비해 짧으니 약간 더 늘리자는 욕심(^^)이 살짝 더해진 결과다.


만개한 벚꽃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세워진 정자가 그림 같다. 찬샘정을 배경으로 9명의 회원들이 기념사진과 독사진들을 찍고 출발. 처음 길은 한적한 시멘트 포장도로, 차가 다니는 길이라는데 워낙 한적한 곳이라서 차라리 시골 농로처럼 보인다.  마을버스가 다닌다는데, 걷는 내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으니 어쩌면 하루에 서 너번 오가는 시골버스인가 싶다. 다행이다.


 사실은 오늘 걸을 3코스를 두고 약간의 고민과 논란이 있었다. 두루누비 앱을 보니 오늘 코스는 걷기 길이 찻길과 대부분 함께 하고 있다. 차 소리를 들으며, 목숨 내놓고 걷는 코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이다.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온갖 신경이 지나가는 차에 쓰여서 걷는 데 집중할 수가 없다. 차라리 3코스를 뛰어넘을까, 아니지 그래도 코스로 지정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왔는데 이제 보니 이유를 알겠다. 찻길이지만 차는 다니지 않는 한적한 찻길, 자연스러운 굽이와 언덕을 오르내리는 호숫가 길이다.

 최고의 계절이다. 우선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걷기에 좋은 날씨다. 긴 팔 티셔츠에 바람막이 점퍼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 그만이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니 눈이 즐겁고 코가 즐겁다. 걷는 내내 수많은 종류의 꽃들을 만난다. 벚꽃, 명자꽃, 개불알꽃, 오야꽃, 조팝꽃, 광대풀 꽃......, 거기에 꽃처럼 예쁜 새싹들이 지천이다. 자꾸만 시선이 꽃과 새싹들로 달려간다.  원래는 걸으면서 내 몸의 느낌과 마음의 흐름에도 집중을 하는 편인데 오늘은 안 되겠다. 그냥 봄을 바라보며 걷자.

일행 중 누군가가 말한다.


 "꽃과 새싹들만 바쁜 게 아니야, 요즘 진짜 바쁜 놈들이 바로 새들이야.  

   짝짓기 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어"


 "그래 맞아, 지금 얼른 짝짓기를 해야 알 낳고 부화하고 어린 벌레들 먹여 키울 테니 바쁠 수밖에"


 가만히 들어보니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귄다. 짝짓기를 하려는 구애송인가보다.


 그러고 보면 봄은 아름답기만 한 계절은 아닌가 보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튀어나오고 짝을 짓고 시작하는 계절, 바로 생명의 계절이다. 봄이 되니 괜히 몸이 스멀스멀, 뭔가 일도 벌이고 싶고  걷고도 싶은 것은 나도 그 생명의 시계에 나도 모르게 조정되기 때문인가 싶다.  온갖 꽃들과 새싹들과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대청호를 따라 호젓한 오백리 길을 걷는다.


 앞서가던 일행이 잠시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뭔가 싶어서 얼른 다가가니 오늘도 숲해설가이신 산자고님의 살아있는 자연교실 1강이 진행 중이다.  1강의 주제는 바로 꼭두서니, 땅을 뚫고 똑바로 선 바로 이 녀석이다.

산자고님의 자연교실, 우리가 트레킹마다 누리는 호사다.
흔히 보던 풀인데 미처 몰랐다. 네가 그 유명한 꼭두서니로구나^^

꼭두서니는 연한 잎과 줄기를 나물로 먹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뿌리를 천연염색, 그중에서도 붉은색의 염료로 쓴단다. 줄기에는 작은 가시들이 달려 있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쪽으로 향해 있어서 다른 식물에 기대기도 하고 벌레가 기어올라오는 것을 막기도 한단다. 줄기는 동그랗지 않고 약간 각이 져 있다. 가만히 보니 흔히 보던 풀 중의 하나다. 알고 있되 모르던 녀석, 꼭두서니야 반가워.


 이후로도 서너 차례, 심심할 때쯤이면 산자고님은 자연교실을 열었다. 오늘은 새로운 무기인 루페까지 가져오신 덕에 우리는 광대풀 꽃의 요염한 속 털과 개불알꽃의 그렇고 그런 씨방까지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조금 걷다 보니 왼쪽으로 사진 찍기 좋은 명소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사진 찍기 좋다는 말은 전망이 좋다는 뜻일 터, 더군다나 오늘 코스가 길지 않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잠시 코스에서 이탈, 파릇파릇 물이 오르는 버드나무와 반짝이는 대청호를 오른쪽으로 두고 구불구불 정겨운 농로를 따라 걷는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 약간의 언덕을 올라서니 대청호가 확 다가온다. 벤치와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한두 명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척하는 사이 다들 쉼터에 둘러앉아 배낭을 열고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꺼낸다. 누가 여기서 간식을 하자고 특별히 제안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둘러앉아 간식을 꺼내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됐다.


 코스가 짧으니 간단한 간식만 챙겨 오라는 사전 공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끼님은 큼직한 김밥을, 나는 아침에 아내가 쪄 준 쑥버무리를 꺼냈다. 이끼님은 그런 사전 공지가 어디 있었냐고 억울해하고 나는 쑥버무리도 간식이라고 우긴다.  찐 고구마에 과일에 떡에 손수 볶아 내린 커피에, 한 끼 식사 같은 간식을 맛나게 먹는다.


내가 이분들을 만난 지는 겨우 3주 전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함께 한 산자고님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이고 지난겨울에는 아내와 셋이서 속리산 둘레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그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대청호 오 백 리 길을 함께 걷자고 제안을 드렸더니 짠 하고 8분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1코스를 걷던 3주 전, 첫 만남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산자고님과 한 두 분이 더 오셨겠거니 생각하면서 주차장에서 승합차의 차문을 여는 순간 3열을 꽉 채운 단체 트레커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눈이 똥그래지고 모두들 깔깔깔 신나게 웃는 걸로 첫인사를 대신했다. 모두들 산자고님 동네에 함께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는 분들인데 거의가 퇴직 교사들이다. 산자고님이 실명을 한 분 한 분 소개해주시고는 덧 붙이신다.


 "그런데, 전부 백수여"


 "그럼 올(all) 백수니까, 올백회네요"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좀 저렴한 조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자고로 이름이야 쉽고 입에 잘 붙고 기억하기 좋으면 되는 법이니 올백회도 괜찮구먼, 이날로 올백회가 됐다.


 겨우 두세 번 뵌 분들인데도 함께 걷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모두들 자기중심이 확실하고 남의 영역을 존중할 줄 아는 분들이다.  적당히 대화를 나누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는 기술,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  한 마디로 내공이 만만찮은 분들이다. 사실 나는 낯가림도 심하고 여럿이 함께 어울려 무언가를 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올백회 백수들과 함께 걸어보니 함께 하는 것도 또 괜찮다.


 조금 걷다 보니 마산동 산성입구라는 안내판이 등장, 원래 코스에서 벗어나서 2km 지점에 산성이 있단다. 그런데 산성을 갔다가 나올 것이냐 그냥 원래 코스로 직진하느냐를 두고 잠시 토론이 벌어진다. 왕복 2km면 한 시간이 넘어 걸릴 텐데, 앞으로 갈 길이 많으니 그냥 직진하자는 비겁파와 언제 이곳에 다시 오겠느냐, 급한 것도 아니고 코스도 짧으니 산성을 다녀오자는 대범파의 주장이 팽팽하다. 나는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비겁파로 녹아들었는데 대범파의 주장은 놀랍게도 올백회의 최고령, 산자고님이다. 절충이 필요하다. 나는 얼른 팀을 둘로 나누자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직진팀이 목적지에서 한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는 게  내 주장이지만 다수결로 단일안을 만들자는 의견에 묵살되었다.  고갯길에서 즉석 투표가 이루어졌다. 결과는 직진 7, 산성 2로 대범파의 참패다. 역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구나, 속으로 낄낄거리면서도 참패한 산자고님이 안됐다.


 고려말에 회덕 황 씨들이 지었다는 미륵원지와 은진 송 씨의 사당들이 있는 관동묘려를 지난다. 이렇게 한갓진 오지에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소인 원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아마도 경부철도나 고속도로, 그리고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지나던 교통의 요지였나 보다. 세월이 흘러 자동차는 물론이고 인적마저 드문 벚꽃길이 다른 시간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라니, 잠시 판타지 영화 속을 걷는 착각 속에 꽃길을 걷는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코스의 백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내륙 속 환상의 섬, 슬픈연가 촬영지를 골라야 할 것 같다. 이곳은 사실은 3코스가 아니라 4코스에 속한다. 3코스의 종점인 마산동의 할매집에서 새뱅이탕에 뻑뻑주로 든든히 요기를 하고는 다음 코스도 줄일 겸 잠시 더 걷기로 했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슬픈연가 촬영지다.


 


 몇 년 전에도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데크와 화단, 벤치 등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잘 조성되어 있다. 옛날 드라마 '슬픈연가'의 촬영지라는데 사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나는 기억에 없으니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내가 이곳에 놀라고 끌리는 것은 따로 있다. 이곳은 대청호 깊숙이 육지가 뻗어 있는 일종의 곶인데 특이하게도 하얀 모래사장이 있다. 아니 무슨 바닷가도 아니고 모래사장일까 싶은데 살펴보면 틀림없이 하얀 모래사장이다. 사실은 바닷가의 모래보다는 굵고 하얀 왕 마사가 깔려 있지만 언뜻 보기에는 영락없이 해변 풍경이다.

일행 중의 산개구리님이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레디 고 하면  나 잡아봐라 하고 이렇게 뛰어가,

  뒤에서는 천천히 따라가고"


낄낄거리며 도망가고 따라가고 그걸 스마트 폰으로 찍는다.

순식간에 이 섬은 드라마 '슬픈연가'가 아니라 60년대 멜로 영화 촬영지로 변신했다.


섬 끝에는 참나무 한그루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땅이 물에 씻긴 듯,  대청호를 배경 삼아 뿌리를 드러내 놓고 혼자 서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태풍이 불면 쓰러지지 않을까, 혹시나 물이 더 차오르면 나무가 죽지 않을까, 그러나 참나무에는 파릇파릇 봄기운이 왕성하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 작은 언덕 위에서 자라났을 참나무, 어쩌다가 주변은 모두 물에 잠기고 혼자 달랑 남아서 뿌리를 드러내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날벼락이라고 할까, 아니면 혼자라도 살아 남았으니 행운아라고 할까? 날벼락이든 행운이든 참나무가 죽지않고 오래오래 살아 남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댐을 막아 산을 호수로 만들면서 수많은 다른 생명들을 해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말이다.


오후 3시 반, 올백회의 세 번째 대청호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행운이다. 거기에 그 길을 함께 걸을 길동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건강과 삶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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