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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Apr 08. 2021

대청호를 걷는데 자꾸만 바다가 떠오르네

대청호 오백리 길 4코스

 오늘도 올백회 9명이 차 3대에 나눠 타고 트레킹을 떠난다. 백수 과로사라, 소득도 없이 바쁜 직업인 데다가  텃밭농사에 정원 가꾸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계절이니 한 두 명이 빠질 만도 한데 출석률이 100%다. 오히려 그동안 단톡방에서 오가는 대화를 보면 은근히 오늘을 기다려 온 눈치다. 물론 기대 속에 한 주를 기다린 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백수의 일상이 대청호 오백리 트레킹으로 적당한 리듬감과 활력을 찾았다.


 회인에서 회남을 거쳐 출발지인 대청호 생태관까지, 오늘도 벚꽃길로 출정을 한다. 개화시기가 조금 늦은 회인은 아직 만개한 상태이고, 지난주에 만개했던 회남과 대전 쪽은 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벚꽃이 워낙 짧은 기간 동안 피어있는 녀석인 데다가 지난 주말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떨어지는 벚꽃의 정취도 만만치 않다. 우선 간간히 바람이라도 불면 꽃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이 환상이다. 눈송이처럼 나풀나풀, 중력과 바람사이에서 춤을 추며 낙하하는 꽃잎들이 마치 대청호 오백리 길로 나서는 우리에게 축복의 꽃 세리머니를 해 주는 것 같다.  떨어진 꽃잎들은 검은색 아스팔트를 캔버스 삼아 연분홍색 점들을 마치 수채화 물감처럼 무수히 찍어 놓았다. 구석진 곳으로는 꽃잎들이 쌓여서 아예 분홍색 카펫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목련처럼  큰  꽃들은 지는 모습이 애처롭거나 지저분해지기도 하는데 벚꽃은 다르다.  꽃눈을 맞으며 꽃 카펫을 밟고 꽃길 걸으러 간다. 마음이 간질간질,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오늘 코스는 4코스 출발지에서 3.5km 떨어진 대청호 생태관 주차장에서 5코스 초입인 절골까지, 대략 13km쯤이다. 올백회원들의  대청호 오백리 길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조금씩 더 걷다 보니 협회에서 정해놓은 코스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게 됐다. 남들에게 소개하기는 좀 번거롭지만 어차피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이다. 길을 새로 내지는 못할망정 구간이라도 우리에게 맞게 끊어보는 거야 문제없지 않을까 싶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서 바로 찻길을 벗어난다. 처음 만나는 풍경은 이제 막 파릇파릇 순이 올라오는 농장의 엄나무 울타리다.  새싹이야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녀석이 없다지만 엄나무 순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건강한 사내아이의 어린 주먹처럼,  여리지만 힘찬 느낌을 주는 데다가 거친 가시와 여린 순이 마치 보색처럼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리라.

  농장을 지나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길로 접어든다. 간간이 산 벚꽃들이 만개한 모습이 마치 환하게 불을 켜고 있는 것 같다. 멀리 눈을 들어 앞산을 보니 군데군데 산 벚꽃들이 숲을 밝혀놓았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사실 산벚꽃은 다른 나무에 비해서 개체수가 그리 많은 나무가 아니다. 멀리서 보면 무슨 특징이 있는 나무도 아니고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군락을 이루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 년에 단 며칠간, 딱 요맘때쯤이면 사정이 다르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면 산벚꽃이 먼저 들어온다. 다른 나무들은 아직 잎을 채 내지도 못한 겨울 모습인데 온 숲을 환하게 밝히는 산벚꽃, 평소에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지만 짧게나마 숲을 대표하듯 화사하게 피어나는 녀석들에게 왠지 응원의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그래, 잘했어. 그동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조금은 속상했지? 이제 괜찮아, 너희들이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야.


 일주일 사이에 꽃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만개했던 벚꽃은 떨어지고 있고 대신 조팝나무 꽃들이 한창이다. 복숭아꽃은 이제 시작이고 붉디붉은 명자나무 꽃은 여전한 상태다. 그 짧은 기간에 눈에 띄지 않지만 아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난 것이다.

 


30분쯤 걷다 보니 탁 인 대청호를 바라보며 전망대와 쉼터가 자리 잡고 있다. 황새바위란다.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황새 같이 생기지는 않았다. 보는 각도가 달라서인지, 아니면 상상력이 부족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신 꽃을 그린듯한 낙서가 돌이끼를 뒤집어쓴 채 암각화처럼 남아있다. 낙서도 시간이 더해지면 자연스러운 예술품이 된다.   일행들은 대청호를 바라보며 가슴도 펴고 사진도 찍는다. 지난번에 다녀온 슬픈연가 촬영지가 이번에는 마치 환상 속의 섬 인양, 위태롭게 물에 떠 있다.


 데크로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대청호를 바라본다. 넓다. 마치 바다를 바라보는 듯 착각이 들 정도다. 물론 눈에 걸릴 것 없는 동해바다가 아니라 다도해로 이루어진 남해바다 말이다. 잠시나마 눈길이 멀어지고 가슴이 넓어진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호수를 건너 나무를 지나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햇살이 따스하고 은은한 꽃향기가 코에 머무는 것도 같다. 문득 대청호 오백리 길이 사랑스럽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 나는 그동안 이 곳을 왜 몰랐던가 아쉽기도 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숲길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는다. 갑자기 산자고님이 뭔가를 발견했다. 나 보고는 여린 잎 몇 개를 따라고 하고는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살아있는 자연교실, 오늘의 1강이다. 먼저 여린 잎들을 나눠주고 자세히 보라고 하신다. 좁쌀 반 정도나 될까, 아주 작은 빨간 무언가가 잎자루 부근에 달려있다. 어떤 잎에는 한 개, 어떤 잎에는 두세 개가 말이다.


 "자 자, 이 빨간 녀석의 정체는 뭘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산자고님의 강의는 늘 이런 식이다. 아는 지식을 그냥 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궁금해하고 상상해보게 만든다. 관찰하는 자연의 대상과 나를 교감하게 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캐 아닐까요? 어릴 때 동생 머리에 많던"


 "아하, 서캐를 닮긴 했네요. 그런데 서캐는 까만색이었던 것 같은데, 요 녀석은 빨갛네요"


 "병이 들은 것 아닐까요? 아니면 작은 벌레의 알이든가......"


 "음, 이건 사실 꿀이에요. 잎이 스스로 꿀단지를 매단 거지요.  그런데 이 작은 꿀주머니는 누구를 위한 걸까요?"


 산자고님이 이번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순간 내 머리에 번뜩 생각하나 가 떠오른다.


 "개미요!"


 얼떨결에 맞췄다. 이 어린잎은 산벚나무의 잎인데 워낙 보드랍고 맛있어서 벌레들의 표적이 된단다.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으니 벌레들을 잡아먹는 개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꿀주머니를 달고 있다는 설명이시다. 산개구리님이 꿀이라는 말에 성급하게 혀를 들이대는데 워낙 작고 보니 엄청 달다는 말은 좀 과장이신 듯싶다. 나도 혀를 대어 본다. 아주 미미하게나마 단 맛이 느껴진다. 참으로 자연은 별별 기상천외한 생존 전략들을 구사하는구나 싶다.

연꽃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으니 어선 하나가 작업 중이다. 여기가 바다인가 호수인가.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번에는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방조제가 나타난 것이다. 아니 여기가 서산 바닷가도 아니고 웬 방조제란 말인가? 여기가 내륙의 호수, 대청호가 맞단 말인가? 다시 눈을 비비고 살펴보아도 호수를 가로지르는 게 방조제가 맞다. 혹시나 둑이 중간에 끊긴 것은 아닐까, 그런데 대청호 오 백 리 길 표지도 보이고 방조제를 건너오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이런 방조제를 만든 이유가 뭔지, 다들 궁금해하며 건넌다. 중간쯤 가서야 방조제의 정체를 알았다. 낡은 콘크리트와 쇠로 만든 수문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이것은 방조제가 아니라 옛날 강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의 본류와 작은 샛강이 만나는 지점에 수문을 만들고 둑을 쌓아 길로도 썼으리라.  대청댐이 수몰되면서 일부러 없애지 않으니 이렇게 방조제처럼 남아있게 됐으리라. 어쨌든 내륙에서 방조제를 만나고 건너는 신기한 경험을 했으니 이것도 대청호 오백리 길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방조제를 건너니 넓은 대청호가 그야말로 바다처럼 펼쳐진다. 어쩌면 이곳이 대청호를 가장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지점 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넓은지 호숫물이 바닷물처럼 찰싹찰싹 파도소리를 내며 부딪힌다. 간간히 붕어로 보이는 죽은 물고기도 보이고 멀리로는 까마귀 떼와 독수리 몇 마리가 함께 모여있다. 덩치 작은 까마귀가 독수리를 툭툭 건드리고 독수리가 슬슬 피하는 모양이 그리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내게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제 길은 대청호 오백리 길 5코스인 흥진마을 갈대숲으로 접어들었다. 일렁이는 억새들과 드넓은 대청호 사잇길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지금도 아름다운데 억새꽃이 하얗게 매달린 늦가을, 초겨울이면 얼마나 장관일까 싶다.


 오후 한 시, 배꼽시계가 따르릉 거린지 한참이나 지났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다.  모두들 미리 준비한 점심을 꺼내놓는데 양과 종류가 만만치 않다.  모양과 재료가 조금씩 다른 김밥은 기본이고 떡과 빵과 찐 달걀에 과일까지 나온다.  나는 아내가 만들어준 취나물 샌드위치에 직접 로스팅한 커피다.


맛있는 점심을 나눠먹으며 자연스럽게 먹는 얘기가 나왔다.  산개구리님이 한마디

 

  "우리 집 가훈이 뭔지 아셔유? 식사는 만사, 먹는 것이 힘이다유. 그러니까 내가 안 먹을 수가 없어유"


'인사는 만사',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속담을 간단히 뒤집은 말인데 기발한 조어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너무 재미있다.  게다가 지식이니 문명이니 갈증에 뒤쫓다가 뭐 별것도 아니구나  적당히 거리를 둘 만한 나이들이고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산개구리님은 이렇게 깊은 삶의 지혜를 어떻게 일찍부터 깨우치셨을까? 나는 이제야 겨우 그럴 수도 있겠거니 짐작하는 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계속된 트레킹도 꽃과 호수, 아니 바다같은 대청호를 따라 이어진다.  바깥아감 부근에는 넓은 주차장에 예쁜 꽃들이 한가득이다.  아름답긴 하지만 잘 정돈된 인공적인 꽃밭은 내 취향은 아니다.  백골산성으로 통하는 산길로 접어드니 비로소 숨이 트인다.  


해발 340m, 백골산성을 가파르게 올라 호흡을 고른다.  산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한적하고 사방이 트인 게 오를만하다.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세워진 백제성으로 많은 군사들이 죽어서 무시무시한 이름을 얻었단다. 그러나 천 몇 백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원혼들도 모두 사라졌을 터, 대청호를 건너 온 골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혀준다.  


 원래는 구절골로 내려가는 코스인데 헤어진 일행을 만나기 위해서 태봉정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조금 내려오다 보니 구부러진 멋진 소나무와 다도해를 연상시키는 대청호가 넓게 펼쳐진다.  얼마 전에 걸었던 남파랑길의 어디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오후 네시, 오늘의 트레킹을 절골에서 마무리한다.

 올백회원들과 오백리 길을 걸으며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충북에도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어선과 방조제와 다도해, 심지어 하얀 모래사장도 있다.  가슴 확 트이는 바람과 찰싹이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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