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반공의 시대

옥수수빵과 국민교육헌장

by 심웅섭

54년,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1967년과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사이의 간격이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니 짧지 않은 세월이다. 더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까지, 미국의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루기까지 폭발적 성장을 이룬 기간 아니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경험한 세대, 그 변화의 폭을 내 기억에 남아있는 몇 장면을 통해서 짐작해본다.


고소한 맛의 기억 - 옥수수빵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났는데 그건 바로 고소한 옥수수빵이었다. 내가 먹어 본 옥수수 빵의 생김새는 두 가지였다. 주로 먹던 옥수수빵은 타원형의 두툼한 모양이었다. 겉은 기름이 살짝 발린 채 고소했고 속은 약간 밍밍한 맛이었다. 배가 고프면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 다 먹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고소한 껍데기만 떼어먹고 속은 손으로 뭉쳐서 놀기도 했다. 약간 거친 옥수수 입자의 식감과 고소한 기름 냄새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또 한 가지 모양은 바둑판처럼 얇고 넓적한 빵이었다. 커다란 빵을 칼로 썰어서 나눠주었는데 이 빵이 더 달고 맛있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러나 주로 먹던 옥수수빵은 앞에서 말한 타원형의 두툼한 빵이었다.

옥수수빵은 주로 학교가 끝날 무렵에 나눠주었는데 처음에는 전교생에게 하나씩 나눠주다가 해를 거듭하면서 그 양이 줄어서 남 녀별로, 분단별로, 청소당번에게만 하는 식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3학년쯤에는 아쉽게도 중단되었다. 빵의 재료인 옥수수 가루가 미국의 원조품인데 그게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란다. 지금으로 치면 굶주리는 아프리카나 가난한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품을 보내듯 그렇게 보내온 옥수수가루였다는 거다. 고소한 맛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참으로 씁쓸한 빵이 아닐 수 없다.

옥수수 빵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씩 내 미각을 즐겁게 자극하던 것이 또 있었으니 그건 바로 우윳가루, 정확히 말하면 우유가루 덩어리였다. 이건 학교에서 나눠주지는 않았고 고아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가끔씩 얻어먹었다. 고아원에서 나눠주는 우윳가루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먹다가 조금 나눠주면 이걸 입에 털어 넣었다. 딱딱한 덩어리, 혹은 가루를 입에 물면 고소하면서도 살짝 달착지근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물론 가난한 나라 아이들에게 지급되던 미국의 구호품이었다.

불온 삐라, 잘하면 연필 한 자루


반공교육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사건은 내가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중이었고 이후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이어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북한을 규탄하는 시민 궐기대회가 여러 번 열렸고 증오와 불안감은 묘한 상승작용을 거쳐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아이들 역시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똥구멍을 발기발기 찢어서

김일성 장가갈 때 덴뿌라를 해주자


끔찍한 가사의 이 노래를 미국 민요 오 수잔나의 멜로디에 얹어서 신나게 불러댔다.


학교가 파하기 전 종례시간이면 풋과일 먹지 않기, 불장난하지 않기, 얼음지치기하지 않기 등의 주의사항들이 계절에 따라 전달되었는데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불온삐라에 관한 것이었다. 불온삐라를 주으면 읽지 말고 바로 선생님이나 파출소에 신고하라는 말 말이다.

불온 삐라, 지금은 탈북단체에서 보내는 대북 전단만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북에서 남한으로 보내는 삐라도 있었다. 과수원에 사는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삐라를 발견할 가능성이 더 컸다. 이리저리 뛰놀다가도 멀리서 뭔가 종이가 팔락거리면 그건 삐라일 가능성이 컸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니 다른 종이를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온 삐라는 빨간색 글씨의 조악한 인쇄물로 김일성의 얼굴이나 남한을 저주하는 거친 표어들이 씌어 있었다. 선생님은 분명 읽지 말고 신고하라고 했지만 이 낯설고 위험한 물건을 보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금지된 문을 여는 묘한 흥분과 호기심으로 위험한 물건인 양, 엄지와 검지 손가락만으로 조심스레 집어서 살펴보곤 했다.

파출소까지 가는 길은 결코 가깝지 않았다. 학교를 지나 북문 다리를 건너서야 중앙파출소가 있었으니 어림잡아 30-40분은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깟 거리가 대수랴, 삐라를 들고 의기양양 파출소로 향했다. 연필 한 자루도 의미 있었지만 조국을 위해 뭔가 역할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출소 순경 아저씨는 아무 표정 없이 덤덤하게 연필을 내밀었다. 내가 느낀 엄청난 모험과 용기에 대한 반응치고는 의외였지만 손에 쥔 연필의 뿌듯한 감촉에 흐뭇해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돌판에 새긴 기억,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으이구, 이놈의 쓸데없는 기억력은 50년도 더 된 국민교육헌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토해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머리가 아니라 입이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스위치를 켜듯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제목만 말하면 좔좔좔 393자의 뜻도 모를 단어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니 말이다.

1968년 12월, 내가 2학년 말쯤에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 학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봄날, 갑자기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라는 엄청난 미션이 떨어졌다. 며칠의 여유를 주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수업이 끝나고도 모두들 교실에 남아서 그놈의 국민교육헌장을 와글와글 외우느라 교실 전체가 웅웅 거리던 장면만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다 외웠다고 생각되는 아이는 손을 들고 선생님 앞에 나가서 검사를 받았고 여기에서 통과해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민족중흥이니 인류공영이니 도대체 뜻도 모를 어려운 한자어를 그냥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된다. 워낙에 말랑말랑한 아이들 머리라서 그럴까. 그리고 말랑말랑한 머리가 굳어서 돌판이 되면서 50년이 지나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내용과 형식이었다. 국민을 일률적으로 교육시키겠다는 독재자적 발상과 개인의 삶의 목적까지 국가에서 가볍게 정의하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는 뭐 시대적인 상황이거니 이해한다고 쳐도, 무슨 뜻인지 가늠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강제로 잡아두고 달달 외우게 했던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미워하고 욕하던 북한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국가 통제사회였으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아이들의 동심을 해치지는 못했다. 나와 동무들은 학교만 끝나면 가방을 집어던지고 모여서 가이생과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다. 바깥 마당이 넓은 집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일 년 내내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소음을 참아 준 어른들이 참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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