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에 취학통지서를 받고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워낙 입이 짧아 키도 작고 다리가 가느댕댕하고 보니 집에서는 아직도 애기 취급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가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셨나 보다. 조금만 열이 나도, 비만 와도 등교를 말리셨다. 보슬비를 맞으며 학교로 나서는 나를 뒤늦게 따라오셔서 덜렁 업고 집에 돌아오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 옷은 무얼 입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깜장 고무신과 가방을 대신한 책보는 기억에 남는다. 책보는 책보따리를 말하는데 싸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커다란 보자기를 펼쳐놓고 가운데 책을 겹쳐 대각선으로 놓는다. 그리고는 책을 둘둘 말아서 옷핀으로 고정하고 보자기의 양쪽 끝을 끈으로 삼아서 등 뒤에 대각선으로 비끄러맨다. 장점은 두 손이 자유로워서 마음껏 놀거나 달릴 수 있다는 점이요, 단점은 여차하면 보자기가 풀리고 뛸 때마다 도시락과 필통이 사정없이 흔들린다는 점, 그리고 책과 공책의 네 귀퉁이가 접혀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책보 경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등에 메는 란도셀이 생겼는데 문제는 색깔이었다. 뒤늦게 사 주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쓰던 걸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인 내 란도셀은 빨간색이었다. 나는 그 빨간색 란도셀이 무척이나 창피스러웠다.
신발은 너나 할 것 없이 깜장 고무신이었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학교 신발장에는 아이들 수만큼의, 그러니까 대충 70켤레의 깜장 고무신이 조롱조롱 놓이는데 아이들은 용하게도 자신의 깜장 고무신을 찾아 신곤 했다. 물론 번호대로 놓는 자리가 정해져 있기도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비슷비슷한 수 십 개의 고무신을 구별할 수는 없는 노릇, 아이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표시를 남기곤 했다. 고무신 앞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아예 구멍을 내는 과격한 방법도 있었고 밑창의 안쪽 부분에 살짝 v자의 칼금을 넣는 온건한 방법도 있었다. 어쨌거나 각자의 비표를 새겨 넣고 쉬는 시간마다 내 고무신이 무사한지 확인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뀌거나 아예 없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났는데 내 고무신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온 기억, 누군가 버리고 간 낡고 발에 맞지 않는 고무신을 질질 끌고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학교 공부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1학년 1학기 국어책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그걸 따라 읽는 아이들의 합창소리가 와글와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영희야 이리 와 바둑이 하고 놀자
처음으로 받아쓰기를 했다. 나는 우선 받아쓰기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다 쓰기라고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바다를 쓰다니 도대체 바다를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선생님이 불러주는 낱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받침은 가물가물,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 받아쓰기에서 내가 받은 성적은 55점, 채점 후 나눠준 시험지에는 예쁜 동그라미보다 죽 죽 그어진 미운 선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최초의 평가 결과, 시험지를 본 엄마 아빠의 표정은 좀 복잡했다.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학교는 집에서 아이 걸음으로 40분쯤 걸렸던 것 같다. 과수원을 나와 아까시나무 사이로 언덕을 내려가면 여수월 마을, 여기에서 동무들을 불러 모아 개울을 건너고 열 마지기라는 논 사이로 구불구불 흙길을 지난다. 다시 교현동 주택가 좁은 골목을 지나면 문방구와 성공회 교회가 나오고 바로 그 앞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다. 전교생이 많을 때는 3,500명이라고 했을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으니 등굣길과 학교 운동장은 그야말로 아이들이 바글바글 넘쳐났다. 일단 학교에 가면 아침 조회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는데 그 넓은 운동장이 꽉 차서 서로 부딪치며 와글와글 놀곤 했다. 남자들은 주로 말뚝박기나 비석 치기 땅따먹기, 그리고 가이생을 했다. 가이생은 땅에 금을 긋고 편을 나눠서 공격과 수비를 하는 다소 과격한 놀이인데 8자 가이생, 지렁이 가이생, 십자 가이생, 오징어 가이생 등이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주로 오재미 놀이와 공기놀이, 그리고 고무줄놀이를 했다. 둘이서 무릎, 허리, 배꼽으로 조금씩 높여 잡는 고무줄을 펄쩍펄쩍 뛰면서 발로 걸거나 밟는 놀이인데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노래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전우야 잘 자거라
아이들 놀이에 웬 군가인가 싶지만 팔짝팔짝 경쾌하게 뛰어야 하는 고무줄놀이에 군가가 딱 맞았나 싶다. 이 밖에도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앞바퀴 뒷바퀴 해방된 민족, 앞에는 운전수 뒤에는 손님' 등의 고무줄 노래가 있었다.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아직까지 귀에 쟁쟁하다.
나는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뒤처지지는 않았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틈에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딱 하나, 내 여자 짝꿍한테 구박을 받는 걸 빼고 말이다.
내 짝꿍은 우선 옷차림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내 짝꿍은 깨끗하고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단히 양갈래로 따서 넘겼고 깜장 고무신이 아닌 구두를 신었으며 예쁜 가방에 필통을 갖고 있었다. 나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지체 높은 공주님같은 존재였다. 문제는 이 짝꿍이 걸핏하면 나를 구박하고 무시한다는 거다. 책상에 금을 긋고는 절대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겁을 주고 실수로 조금 넘어가면 손을 때리거나 눈을 부라리곤 했다. 하루는 내가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학교에 가져갔는데 짝꿍이 빼앗아서 망설임 없이 이걸 분해했다. 앞부분을 뱅글뱅글 돌려서 빼내고 조그만 용수철과 볼펜심을 분리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넘겨보고 있는데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내 뺨을 톡톡 치며 쏘아붙였다.
"아이고, 그래도 지가 줬다고 쳐다보네. 야, 쳐다보지 마"
그 모습과 대사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무척이나 억울했나 보다.
1학년에서 2학년, 3학년이 되면서 나는 점점 잘 적응했다. 1학년 1학기 결석일수 28일, 방과후 나머지 공부까지 했는데, 그후로는 성적이 조금씩 좋아지고 결석일수도 줄었다. 건강은 좋아지고 학교 생활도 더 재미있어했다. 짝꿍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고 대등한 동무로 대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