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
5학년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로도 제법 오랫동안 학교에서 나는 특별한 아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아이인 것처럼 착각하며 자랐다. 이 기간에 학교에서 있을 법한 애들 감투는 거의 빠짐없이 써 봤기 때문이었다. 어른들도 한 번 맛보면 헤어나기 힘들다는 감투의 맛, 나는 그걸 너무 일찍 봐 버린 것이다.
맨 먼저 쓴 감투는 부반장이었다. 4학년 2학기에 부반장으로 뽑혔는데 담임 선생님이 무서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느라 도대체 부반장 역할을 하기나 한 것인지 기억이 없다. 그런데 5학년이 되자 이번에는 반장으로 뽑혔다. 어쩌다가 갑자기 반장이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자신만만하고 명랑하게 까불어대니까 아이들이 재미있어서 뽑아준 것 아닌가 싶다.
그 시절 반장은 선생님을 대신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존재였다. 우선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차렷, 경례 구호를 폼나게 외쳤고 자습시간에는 선생님 대신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쳤으며 떠드는 사람 이름을 공책에 적어서 일러바쳤다. 자질구레한 전달사항을 아이들에게 전하거나 숙제나 준비물을 걷어서 선생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쓰는 기다란 막대기, 수 틀리면 아이들의 머리에 사정없이 떨어질 수도 있는 그 권력의 상징물로 교탁을 탕탕 두들기며 아이들을 혼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선생님의 대리자이자 작은 폭군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5학년 때는 4학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상한 성격의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이뻐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은 간단한 선물을 받았다. 주로 연필이나 공책 같은 문방구가 많았고 때로는 사탕 같은 간식거리를 받기도 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시내에 사는 몇몇 학부모들이었다. 주로 장사를 하는 집들, 그러니까 비교적 돈이 있고 시간 여유도 많아서 학교에 자주 드나드는 부모님들이었다. 아버지가 농사짓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는 우리 집은 당연히 선물을 가져오는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해 어린이날, 어머니가 예고 없이 쑥떡을 해서 머리에 이고는 학교에 나타나셨다. 늘 입는 노란 스웨터에 쪽 찐 머리로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어머니, 젊고 세련된 옷차림에 화장까지 한 다른 엄마들에 비해 눈에 띄게 나이 들고 촌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 일단 창피했다. 더구나 쑥절편이라니, 세련되게 연필이나 하다못해 눈깔사탕이라도 나눠주면 좋으련만 미끈미끈 손에 기름 묻는 쑥절편이 뭐란 말인가. 그 쑥절편의 재료가 쌀이 아니라 값싼 싸라기임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더욱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엄마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에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 엄마와 쑥절편을 극구 칭찬하는 거였다. 그 칭찬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엄마들과 달리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거나 혹은 떡에 손으로 일일이 기름을 발라서 머리에 이고 나타나신 것에 감동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잔뜩 창피해서 기죽어 있던 나는 어리둥절했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반장도 대단한 일인데 훌륭한 엄마까지 뒀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그런 엄마의 보이지 않는 도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더 큰 감투 운이 내게 다가왔다.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인가,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어린이 회장 선거에 나갈 것을 권했고 연설 원고에 연습까지 시켜주셨다. 50년 전 원고 내용이 기억날 리 없지만 딱 한 대목만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키도 자그마하고 얼굴도 까무잡잡한 이 심웅섭이가
어떻게 어린이 회장이 되겠다고 이 자리에 나왔느냐?"
나중에 아침 조회 시간에 교단에 올라서 정견발표라는 걸 했는데 이 대목에서 아이들이 낄낄거렸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 봐서는 그렇게 우습거나 기발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어린이 회장에 당선되었다.
어린이 회장, 그건 반장보다 훨씬 더 폼이 나는 자리였다. 우선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모든 선생님들은 나를 알아봤고 마주치면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네셨다. 아이들도 은연중에 나를 특별한 아이, 대표자로 인정하는 듯했다.
어린이회의라는 것이 있었다. 매달 각 반에서 아이들이 자체적으로 회의를 하고 여기서 안건을 모아서 전체 회의를 하는, 이를테면 반대표들이 참석하는 전체 회의였다. 안건들이야 주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주제들, 어떻게 학교를 깨끗하게 할 것인가 등의 몇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쨌든 명색이 전체 아이들의 대의기구였다. 그런데 여기서 어린이 회장은 회의의 진행자, 의장이었다. 폼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폼이 나는 일이 생겼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이 터지고 고등학교에는 교련교육이 시작되었다. 물론 국민학교에는 교련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반공과 교련이라는 분위기에 앞서가려는 선생님들의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교육청의 지침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 열병식이 생겼다. 가끔 TV에서 국군의 날이나 북한 노동절 기념식 등에서 볼 수 있는 장면, 군인들이 총을 메고 열을 지어 지휘관 앞을 지나며 경례를 부치는 그 열병식 말이다. 그 열병식의 연대장이 바로 어린이회장인 나였다.
본격적인 열병식 실시에 앞서서 선생님이 몇 가지 구령들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처음 듣는 군사용어가 참으로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선 열병, 아니 열병은 몸이 펄펄 끓는 나쁜 병인데 그걸 먼저 아이들에게 외쳐야 한단다. 그다음은 분열, 분열은 일사불란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흩어진다는 나쁜 의미인데 그걸 또 전교생에게 외치란다. 어쨌거나 전교생 앞에서 보이스카우트 제복을 입고 열병이니 분열이니 뜻도 모를 구령을 외쳤고 교장선생님에게 군대식 경례를 부쳐댔다. 3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먼지와 더위속에서 땀을 흘려가며 발을 맞추어 행진을 했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마치 지휘관이 된 것처럼 으쓱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폼을 잡았다.
한 번 시작한 감투 행진은 중학교에서도 계속됐다. 크지 않은 중소도시이고 보니 국민학교 어린이 회장 이력이 작용을 했으리라. 1학년부터 매 학기 반장을 했고 3학년에는 학생회장을 했다. 국민학교와 다른 점은 학생들의 직접선거가 아니라 선생님이 임명한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유신이 선포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기 실시되었고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체육관 선거가 실시되었으니 학교에서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자질구레한 보이스카웃, 청소년 적십자, 자유교양 대회 등등 웬만한 대 내외적인 활동과 경연대회는 거의 대표로 나갔으니 학교에서는 그야말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니 어린 마음에 잘난 척과 우월감이 철철 넘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일찍 맛본 감투의 맛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당시로서는 세칭 일류학교였고 나 정도의 이력을 가진 아이들로 차고 넘쳤다. 게다가 제법 찐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만들어 갔는데 여기에서 감투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어쨌든 중학교의 학생회장을 마지막으로 감투는 평생 동안 나와 멀어져 갔고 나도 그런 감투를 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