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국민학생 시절은 어느 순간 졸업과 함께 끝나버리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마음의 준비를 한 적도 없었다. 그냥 1년 2년이 지나서 6학년이 되었고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인생의 큰 변화는 때가 되면 저절로,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원하느냐, 맞을 준비 되어있느냐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중학생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은 것은 나와 상의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거나 국민학교 시절이 더 지속되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우선 제발 이 학교만 아니길 바라던 최악의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충주에는 모두 세 개의 남자 중학교가 있었는데 내가 배정된 학교는 집에서 가장 멀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사립중학교였고 2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로 학생들을 모집하던, 속된 말로 똥통학교였다. 교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진 모자에 딱딱한 목 칼라, 좌우 칼라를 여미는 호크, 검고 어두운 색까지, 어느 것 하나 정이 붙지 않았다. 감옥에 가는 것도 군에 입대하는 것도 아닌데 머리를 빡빡 밀어서 삭발하는 것도 싫었다. 다행히 내 두상은 울퉁불퉁 감자는 아니었으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손끝에 걸려오는 까실한 머리의 감촉은 아주 오랫동안 낯설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선도부가 복장 검사를 한다. 호크가 채워지지 않았거나 모자가 삐뚫어 졌거나 하면 복장 불량으로 벌을 서거나 심하면 얻어맞기도 했다. 교문을 들어서려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두려움을 뚫고 등교해야 했다. 학교라기보다는 병영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교실 안의 풍경도 삭막해졌다. 아기자기한 국민학교의 환경미화는 사라지고 달랑 책상과 의자만 있는 교실 풍경, 거기다가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검은색 교복에 까까머리를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교과서를 받았다. 국민학교에서는 배우지 않던 영어가 시작되었다. 처음 만나는 영어란 녀석은 도무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책을 펴니 Lesson one이라는 글자가 먼저 나왔다. 스펠링으로 무조건 외웠다. 엘이 에스에스 오엔 오엔이, 엘이 에스에스 오엔 오엔이......, 수학에서는 방정식이라는 말이 나를 기죽게 했다. 웬만한 한국말은 들으면 대충이라도 짐작이 가는데, 요놈의 방정식이란 말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 달 지나면서 보니 또 별것도 아니었다. 우락부락 무서워 보이는 친구들도 모두 검은 옷에 머리를 깎아서 험상궂어 보일 뿐, 나와 다를 바 없는 꼬맹이들이었고 처음 배우는 영어도 낯선 용어의 방정식도 알고 보니 어렵지 않았고 재미있었다. 흠, 변화라는 게 뭐 알고 보면 별 거 아니로구나.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게 그리 무서워할 것도 아니로구나.
세번째, 건방진 자세와 얼굴로 서있는 까까머리가 바로 나다
사립학교다 보니 이사장 가족들을 중심으로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른바 족벌 경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사장 집안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 감리인가 무슨 직을 맡고 있었는데 문제는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선생님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도 선생님들에게 전혀 공손하지 않는 말투로 마구 대했고 심지어는 수업시간까지 들어와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하루는 여럿이 보는 데서 따지고 대들었다. 그 당시 상황이나 내가 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들면서도 내심 무척이나 쫄았던 것은 기억난다. 거의 무소불위 격인 저 어른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가혹한 보복을 할지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그 젊은이가 그 후로는 나를 친구로 대하는 것이었다. 나를 만나면 꼭 눈을 맞추고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럿이 보는 데서 감히 자신에게 대든 건방진 꼬맹이에게 가혹한 응징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텐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쫄지 말고 당당히 저항하면 무서워 보이는 적도 기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상대방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런 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 내 나름대로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나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것저것 애들 감투를 써 보면서 간이 부은 것일까, 아니면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는 대쪽 같은 아버지의 성품이 나이가 들면서 슬슬 나타났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국민학교 4학년 때의 기억 때문은 아닐까, 두려워서 비겁하게 굴복하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더러운 느낌인지 뼈저리게 느낀 덕분에 차라리 죽기 살기로 대들기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나에게는 알 수 없는, 그러나 통쾌한 승리의 기억이었다.
자유교양 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고전을 읽어 민족정기 드높이자'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모 신문사가 문교부의 후원으로 주최하는 전국단위의 독서 경연대회였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학교끼리의 자존심을 건 묘한 승부 경쟁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아예 몇 명을 미리 뽑아서 수업도 열외 시키면서 고전을 읽게 했다. 1학년 때 나도 그 몇 명에 속하게 됐다. 국어 선생님은 예쁜 처녀 선생님이었는데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선생님이 뽑힌 아이들 몇 명을 양호실에 넣어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셨다. 딴 데 가지 말고 조용히 책을 보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양호실은 폭신폭신한 침대가 있었고 베개가 있었다. 읽으라는 책을 대충 덮고는 한 시간 내내 침대에서 방방 뛰며 베개 싸움을 해 댔다. 나중에는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침대는 없었지만 바로 매점 옆이었다. 우리는 책도 읽고 매점에서 빵과 도넛을 사 먹으며 꿀 같은 시간을 보냈다.
기적이 일어났다. 자유교양 대회는 시에서 예선을 치르고 입상자들이 도에서 다시 경합을 벌인후에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본선을 치르는 형식이다. 그런데 내가 충주시에서는 동상, 충청북도에서는 은상으로 서울에 시험을 치르러 가게 된 것이다. 워낙 까불고 뛰어 놀기만 하던 내가 상을 받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비밀이 하나 있었다. 청주에서 치른 도 대회에서 내가 커닝을 한 것이다. 그 커닝한 문제와 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상륙한 후에 제일 먼저 떨어진 물건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옆에 앉은 예쁜 여학생의 답안지를 훔쳐보았다. 답은 잉크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어쩌면 내 인생 최초의 커닝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덕분에 나는 은상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고 누구에게도 커닝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데를 가 봤다. 자유교양 대회가 열린 곳은 서울의 수송 국민학교였다. 우선 건물이 5층이라는 게 놀라웠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2층, 충주시에서 좀 높다 해도 3층 건물이 고작인데 5층이라니, 게다가 운동장은 턱없이 좁아 보였고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어쨌든 내가 처음 만난 서울은 화려하거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에는 수송 국민학교가 종로구의 어디쯤, 서울의 번화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유리 부근의 변두리 학교였다. 그런데 이 서울대회에서 또 기적이 나타났다. 내가 충청북도에서 유일하게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비록 충청북도에서는 장려상도 하나 받지 못하자 주최 측이 제도에도 없던 노력상을 즉석에서 만들어 준 덕이지만 말이다.
청소년 적십자에 들었다. 매주 일요일에 탄금대 휴지를 주으러 갔는데 요게 또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충주시내 중, 고등학교에서 단원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여학생들이 있었고 나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여학생을 만나다가 단속되면 정학 처분을 받던 시절이었으니 휴지를 핑계로 합법적으로 함께 걷고 얘기 나누는 이 분위기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매주 즐거운 마음으로 멀고도 먼 탄금대까지 휴지를 주으러 다녔다.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었으니 중학교 학생회장도 학생들의 직접선거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임명한 것인지 아니면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본떠서 반 대표들이 뽑은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크지 않은 도시다 보니 국민학교의 전력이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국민학교와는 다르게 중학교 학생회장은 내게 강한 기억을 각인하지는 않았다. 경제성장과 반공을 구실로 국가 전체를 병영화하는 유신 시절이었으니 열병과 분열 같은 군사훈련을 했을 만도 한데, 국민학교와는 다르게 으쓱하며 구령을 외친 기억도 없다. 친구들을(이 즈음부터 동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고 친구라는 한자어가 대신 등장했다) 벌주거나 때린 아픈 기억도 없다. 어쩌면 조금씩 내가 선생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학생들의 대표라는 초보적인 생각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똥통학교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리라,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야간 타율학습 비슷한 걸 했던 기억도 난다. 어쨌거나 그 덕에 내가 다닌 중학교는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 그중에서도 세칭 일류고등학교인 청주의 모 고등학교에 스무 명이 넘는 합격자를 낸 것이다.